2화
‹ ›[경고: 인격 프로토콜 붕괴 위험 — 즉시 정정하십시오]
그 문구가 시야 한복판에서 벌겋게 깜빡였다.
마치 오래된 오락실 게임기가 "GAME OVER, CONTINUE?" 하고 목숨을 구걸하던 그 화면처럼, 딱 그 타이밍에, 딱 그 색깔로.
'뭔 게임 오버 문구가 실시간으로 튀어나와?'
이게 진짜 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시간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지끈, 하고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마치 누가 내 뒤통수를 헬멧으로 씌우고 나사를 조이는 것처럼.
"도련님?" 박도윤이 다가오며 걱정스레 나를 붙잡았다.
손을 뻗는 게 느껴졌다. 도움을 받으려는 순간, 통증이 두 배로 커졌다.
찌이잉―!
시야가 새하얘질 정도의 통증이었다. 눈앞에 별이 튀는 게 아니라, 아예 우주가 통째로 지나갔다.
'아, 이거 도움받으면 더 심해지는구나.'
나는 이를 악물고 그의 손을 스스로 뿌리쳤다.
"됐다." 나는 최대한 오만한 말투를 억지로 짜냈다.
목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마치 목젖에 모래가 낀 느낌이었다.
"됐어, 필요 없어. 물러나."
순간, 통증이 잦아들었다.
거짓말처럼, 스위치 하나를 내린 것처럼, 뒤통수를 조이던 압박이 스르륵 풀렸다.
[경고 해제. 인격 안정성 회복률 87%.]
허... 이런 미친.
박도윤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왜 이렇게 부담스러운지. 좋은 사람이 좋은 의도로 다가오는 게 지금 이 순간엔 흉기처럼 느껴진다는 게 웃겼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니까 그 얼굴 좀 치워." 나는 손사래를 쳤다. 진심을 담아서.
그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결국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 한켠이 불편했다. 원래대로라면 "고마워요, 걱정해줘서" 정도의 말 한마디는 해줘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런데 그 정상적인 말이 지금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숨을 몰아쉬며 시야에 뜬 창을 다시 불러냈다.
[상태]
[이름: 이하준]
[보유 능력: 원작 기억]
[제약 사항: 1. 겸양·경어 사용 시 인격 안정성 하락. 2.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시 인격 안정성 급락. 3. 안정성 0% 도달 시 정체성 붕괴]
'뭐야, 이거 완전 사기 능력에 사기 페널티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원작 기억이라는 능력.
앞으로 벌어질 일을 대략적으로 안다는 건 정말 엄청난 무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로또 1등 번호를 미리 알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그 번호를 종이에 적어서 남에게 보여줄 수가 없다는 거지만.
그런데 그 대가로, 나는 원작 속 오만하고 냉정한 이하준의 '인격'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거였다.
경어를 쓰면 무너지고, 남에게 도움을 청하면 무너진다.
즉, 겸손하고 다정한 현대인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려는 순간, 이 몸 자체가 붕괴한다는 소리였다.
'이거, 완전 캐릭터 붕괴 방지 시스템이잖아.'
작가가 설계한 캐릭터성을 강제로 유지시키는, 지독하게 악랄한 자물쇠. 마치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 캐릭터는 절대 착해지면 안 됩니다"라는 계약서를 강제로 들이미는 느낌이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이마를 짚었다.
'그럼 나는 평생 저 재수 없는 도련님 캐릭터로 살아야 한다는 거야?'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인생을 받았을까 생각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냥 운이 나빴다고 치기로 했다.
실험을 좀 해봐야 했다.
과학자 마인드로 접근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 몸에 매뉴얼이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씩 부딪혀보면서 데이터를 모으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나는 일부러 하녀에게 반말로 명령을 내려봤다.
"차 가져와." 딱딱하게 말했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통증도 없었다.
하녀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마치 이런 말투가 당연하다는 듯이.
'좋아, 오만함은 정상 작동이라는 거지.'
반대로 정중하게 부탁해봤다.
"차 좀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
찌잉―!
곧바로 뒤통수가 저릿했다.
'그럼 그렇지.'
하녀는 오히려 그 말에 당황한 눈치였다. 이 집안 도련님이 하녀한테 존댓말을 쓴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그녀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너도 이상하지, 나도 이상해.'
확실했다. 오만함은 유지, 겸손함은 금지.
몇 번을 더 반복해봤다. "고맙다"는 그나마 괜찮았다. 짧고 건조하게 내뱉는 감사 표현은 통증이 미약했다. 그런데 "고마워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같은 식으로 정중함이 더해지면 즉시 경고가 튀어나왔다.
말투의 격식, 그게 핵심인 것 같았다.
도움 요청도 마찬가지였다. 서고에서 무거운 책을 옮기다가 도와달라는 말이 턱 밑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책장은 내 키보다 높았고, 맨 위 칸에 있는 두꺼운 가죽 장정 책 하나를 꺼내려면 발끝으로 서서 팔을 한계까지 뻗어야 했다. 손끝이 겨우 책등에 닿을락 말락 했다. 그 순간에도 뒤에서 서성이는 시종의 발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제가—"
"됐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혼자 낑낑거리며 결국 책을 끄집어냈다. 먼지가 뭉텅 떨어져서 콜록거리는 와중에도, 뒤통수는 조용했다.
'그래, 이게 정답이지.'
'혼자 다 해야 하는 인생이라니, 이게 무슨 판타지 세계관 나 홀로 아르바이트야.'
몸에 근육통이 쌓이는 것보다, 저 뒤통수 통증이 더 무서웠다. 근육통은 며칠 쉬면 낫지만, 저건 잘못하면 진짜로 내가 사라질 것 같았다.
문제는 그거였다.
원작 지식만 갖고 있어봤자, 결국 강태오는 15년 뒤에 나를 이긴다.
원작이 정한 결말대로라면, 나는 아무리 오만하게 굴어도 결국 패배한다.
그 결말을 떠올릴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원작에서 이하준은 정확히 이 시기에 시작해서, 정확히 15년 뒤에 강태오의 손에 모든 걸 잃는다. 재산, 지위, 그리고 목숨까지도.
'재능만으로는 안 된다는 소린데.'
원작 속 이하준은 재능이 없어서 진 게 아니었다. 그는 천재였다. 다만 노력하는 법을 몰랐고, 사람을 부리는 법만 알았지 사람과 함께하는 법은 몰랐다. 그게 그의 패배 원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오만함을 유지해야 이 몸이 붕괴하지 않는다.
'앞뒤가 안 맞잖아, 이거.'
오만하게 굴어야 살고, 오만하게 굴면 결국 진다.
완벽한 딜레마였다. 마치 시험 전날 밤에 "잠을 자야 컨디션이 좋다"와 "밤새 공부해야 시험을 잘 본다"가 동시에 참인 상황이랄까.
그때 상태창 구석, 처음 보는 낯선 항목이 눈에 걸렸다.
[미확인 스탯: 노력치 0/???]
'이건 또 뭐야.'
원작에 이런 스탯이 있었다는 기억은 없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문구를 다시 들여다봤다. 손가락으로 허공에 뜬 글자를 찔러봤지만, 당연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냥 시야에 박힌 텍스트일 뿐이었다.
분명 원작 소설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던 개념이었다.
나는 원작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이하준이라는 캐릭터의 성격, 대사 하나하나, 심지어 그가 몇 살에 첫 마법을 배웠는지까지 외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스탯은, 단 한 줄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이게 원작에 없던 변수라면, 이건... 어쩌면 내가 결말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틈일지도 몰랐다.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가능성이라는 게 이렇게 생긴 거였구나, 싶었다. 원작대로만 흘러간다면 나는 15년 후에 죽는다. 그런데 원작에 없는 이 낯선 항목 하나가, 지금 내 눈앞에 떠 있었다.
'0/??? 이라는 건, 최대치가 얼마인지도 모른다는 소리잖아.'
물음표 세 개. 이게 999인지, 9999인지, 아니면 그보다 훨씬 큰 숫자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일단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 스탯은 지금 0이라는 것.
'그럼 올려보면 되는 거 아닌가?'
단순하지만, 그게 지금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밧줄이었다. 오만함을 유지해야 하는 몸뚱이 안에서, 노력치라는 걸 어떻게 쌓아 올릴 수 있을지는 아직 감도 안 잡혔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 순간 나는 오히려 마음이 조금 놓였다.
원작이 정해놓은 결말이 있다면, 원작에 없는 이 변수도 분명 결말을 바꿀 힘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어보기로 했다.
밖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박도윤이 문 앞에서 조심스레 노크를 하고 있었다.
"도련님, 저녁 식사 준비가 되었습니다."
나는 상태창을 닫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다시 그 오만한 표정을 얼굴에 씌웠다.
'노력치라는 게 뭔지는 몰라도, 일단은 이 재수 없는 도련님 노릇부터 완벽하게 해내야겠지.'
문을 열고 나서자, 박도윤이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 뒤에, 뭔가 더 큰 걸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놈, 뭔가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원작에서 박도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조연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저 눈빛은, 절대 단순한 하인의 것이 아니었다.
'설마, 저놈도 뭔가... 다른 게 있나?'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