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냉혈 후작의 착취 일지

3화

저택은 넓고 조용했다. 조용한 게 아니라 텅 빈 거였다. 발소리만 대리석 바닥에 부딱부딱 울려서, 내가 걸을 때마다 유령의 집 체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방 백 개짜리 집에서 밥 한 끼 못 지어먹는 남자가 됐다. 냉장고가 있을 리도 없었다. 얼음 마법사라도 하나 고용해야 하나 생각했다가, 지금 내 형편에 그건 사치라는 걸 깨닫고 접었다. 부엌에 들어가 봤다. 화덕 앞에 서서 부싯돌 비슷한 걸 딱딱거려 봤지만 불은 안 붙고 손만 아팠다. 전생에 편의점 알바 할 때 라이터로 원터치 가스레인지도 켜봤는데, 여긴 그런 문명의 편의가 없었다. 화덕 옆에 장작이 쌓여 있는 걸 보고 잠깐 감동했다가, 그 장작을 어떻게 쪼개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다시 우울해졌다. 이건 뭐지. 뭐긴 뭐야. 자기 발등 찍은 거지. 전생에는 라면 하나 끓여 먹을 시간도 없었지만, 적어도 끓이는 법은 알았다. 냄비에 물 붓고 봉지 뜯고 삼 분 기다리면 끝나는 그 간단한 과정을. 지금은 창고에 밀가루며 육포며 재료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그걸 어떻게 조리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후작가 도련님으로 자란 몸의 기억엔 요리 같은 건 없었다. 이 몸의 전 주인은 태어나서 한 번도 부엌 문턱을 넘어본 적이 없었던 게 분명했다. 사흘을 빵과 물로만 버텼다. 그것도 창고에 남아 있던, 이미 살짝 딱딱해진 식빵 같은 걸 뜯어먹은 거였다. 씹을 때마다 턱이 아팠다. 전생 편의점에서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도 이렇게까지 서럽게 먹진 않았는데. 저택 청소도 안 됐다. 먼지가 벨벳 소파 위로 뽀얗게 쌓였다. 손가락으로 슥 그어보니 그대로 자국이 남았다. 하얗던 창문이 회색으로 변해갔다. 볕이 들어와도 뿌옇게 흩어질 뿐, 방 안은 어딘가 부옇고 흐릿했다. 딱 내 처지 같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밥 한 끼 못 해먹고 청소도 못 하는 후작이라니. 이러다간 굶어 죽기 전에 먼지 알레르기로 먼저 죽을 판이었다. 생각을 다르게 해야 했다. 나는 전생에 뭘로 먹고 살았지. 시급 노동. 그리고 재고 관리. 그리고— 숫자. 숫자는 내가 잘하는 거였다. 창고에서 십 년 넘게 재고표를 맞추다 보면 어디서 물건이 새는지 감각으로 안다. 박스 하나가 안 맞아도, 숫자 하나가 어긋나도 바로 눈에 들어오는 그 감각. 전생 사장이 시급은 안 올려줘도 그 능력만은 인정해줬었다. 허태석이 두고 간 장부를 다시 펼쳤다. 이번엔 화내지 않고, 차분히, 숫자만 봤다. 화를 내봤자 배가 채워지는 것도 아니고, 감정으로는 절대 이 상황이 안 풀린다는 걸 사흘 굶어보니 절실히 깨달았다. 포도주 구매 내역, 조경 예산, 봉급 지급 명단. 하나씩 짚어가며 손가락으로 훑었다. 포도주는 한 달에 스무 병씩 나갔는데, 저택엔 그 흔적조차 없었다. 조경 예산은 정원사 인원의 세 배쯤 되는 금액이 잡혀 있었다. 그리고 봉급 지급 명단. 명단에 있는 사람 수와 실제 저택에서 본 사람 수가 안 맞았다. 하나, 둘, 셋... 열둘까지 세다가 멈췄다. 명단엔 열여덟 명이 적혀 있는데, 내가 사흘 동안 마주친 사람은 다 합쳐도 여섯이 안 됐다. 유령 직원이었다. 없는 사람한테 월급이 나가고 있었다. 와.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예술이다. 전생에 뉴스에서 보던 유령 회사, 페이퍼 컴퍼니 그런 거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적어도 그쪽은 서류라도 그럴싸하게 꾸미던데, 여긴 이름만 적어놓고 끝이었다. 누가 감사라도 나오면 어쩌려고 이렇게까지 대놓고 했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밤새 장부를 뜯어봤다. 촛불 하나 켜놓고, 배는 꼬르륵거리는데 머릿속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사람이 굶으면 오히려 정신이 맑아진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숫자들이 눈앞에서 정리되기 시작했다. 어느 항목이 부풀려졌는지, 어느 이름이 실체 없는 그림자인지. 다음 날 아침, 배는 여전히 고팠지만 머릿속은 명료했다. 이건 단순한 해고로는 안 되는 문제였다. 시스템 자체를 다시 짜야 했다. 사람 몇 명 자르는 걸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구조를 짜놓고 빼먹은 놈이 문제였고, 그 구조를 그대로 두면 다음 관리인이 와도 똑같은 짓을 되풀이할 거였다. 최소한의 사람은 필요했다. 밥 해줄 사람, 청소할 사람. 대신 이번엔 유령 직원이 아니라 실제로 일할 사람. 봉급도 제대로, 대신 착복은 절대 안 되게. 매달 장부를 직접 확인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전생 사장처럼 되진 않겠다고. 영지 관리소에 공고를 냈다. 저택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고. 조리사 한 명, 청소 인력 몇 명, 정원사도 하나. 급여는 시세보다 조금 높게 적었다. 전생에서 최저임금도 안 주던 사장들 생각하면서, 나는 조금 다르게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물론 이건 선의가 아니었다. 계산이었다. 착취할 대상이 도망가면 곤란하니까, 최소한의 미끼는 던져야 한다고. 사람을 쓰려면 사람이 남아 있어야 하는 법이고, 남아 있게 하려면 최소한의 조건은 맞춰줘야 한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선의라고 하면 어딘가 낯간지럽고, 계산이라고 하면 마음이 편했다. 공고를 낸 다음 날, 사람들이 줄을 섰다. 후작가라는 이름값 때문인지, 아니면 급여 때문인지, 아침부터 저택 앞마당에 열 명 넘는 사람이 서 있었다.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다들 옷차림이 제각각이었다. 낡은 셔츠에 흙 묻은 앞치마를 입은 사람, 그나마 깔끔한 원피스를 입고 온 사람, 아이 손을 잡고 온 사람도 있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한 명 한 명 훑어봤다. 면접이라기보단 얼굴 도장 찍는 정도였다. 이름 묻고, 할 수 있는 일 묻고, 언제부터 일할 수 있냐 묻는 게 다였다. 몇몇은 눈도 못 마주치고 바닥만 보며 대답했다. 아마 후작이라는 직함에 눌린 모양이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속으로 웃었다. 전생 알바 면접 볼 때 내가 딱 저랬는데. "요리는 할 줄 압니까." "네, 후작님. 십 년 넘게 여관에서 일했습니다." "청소는요." "매일 하던 일입니다." 간단명료한 대답들이 오갔다. 몇몇은 과장을 섞어 말했고, 그 과장이 눈에 훤히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일단 사람이 있어야 뭐라도 굴러갈 테니까. 그 줄 맨 끝에, 유난히 조용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이력을 늘어놓거나, 웃으며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거나, 최소한 눈이라도 마주쳤는데, 그 사람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옷차림은 다른 이들보다 오히려 정갈했다. 낡았지만 깨끗하게 빨아 입은 옷. 손등엔 흙보다는 다른 무언가의 흔적이 있었다. 잉크였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이상하게 그쪽으로 발이 안 떨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스쳐 지나가면 됐는데, 이 사람 앞에서는 이유 없이 발이 무거워졌다. 뭔가 이상한 예감이었다.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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