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냉혈 후작의 착취 일지

1화

택배 상자를 열여덟 개째 나르는 중이었다. 새벽 세 시, 물류창고 바닥은 한겨울인데도 등이 흠뻑 젖어 있었다. 형광등 하나가 깜빡거렸고, 그 밑에서 나는 상자를 들었다 놨다 하며 시급을 벌었다. 시급 구천오백 원.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돈을 벌겠다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상자를 날랐다. 사장님은 오늘도 사람이 부족하다고 했다. 사람이 부족한 게 아니라 사람을 안 쓰는 거겠지, 그 돈 아끼려고. 옆에서 같이 상자를 나르던 형이 낮게 욕을 뱉었다. 나도 속으로 똑같은 욕을 뱉었다. 겉으로는 웃었다. 웃어야 다음 달에도 일이 들어오니까. 스물아홉 해를 그렇게 살았다. 최저임금에서 십원 한 장 더 안 얹어주는 사장들, 야근 수당을 야근이 아니라고 우기는 팀장들, 그 밑에서 웃으면서 버텼다. 억울하다고 소리친 적도 없다. 그럴 힘도 없었으니까. 소리치면 다음 날부터 시급이 끊길 걸 아니까. 그게 무서워서, 그냥 웃었다. 친구들은 다 회사원이 됐는데 나는 여전히 물류창고와 편의점 알바를 오가며 살았다. 명절에 본가에 가면 엄마는 아무 말도 안 했지만 그 눈빛이 더 아팠다. 나도 알았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세상이 나한테만 유독 각박한 것 같았다. 그날은 지하철 막차를 놓쳐서 첫차를 기다리다 졸았다. 사흘 연속 야간 근무였다. 눈이 감기는 걸 참으려고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배를 채우고, 캔커피 두 개를 연달아 마셨는데도 몸이 말을 안 들었다. 플랫폼 벤치에 앉아 있다가 스르르 눈이 감겼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발이 플랫폼 끝에 있었다. 딱 한 걸음.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너무 높았다. 새하얀 천장에 금박으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이건 뭐지. 반지하 원룸 천장은 절대 이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곰팡이 자국도 없고, 형광등 대신 크리스탈 샹들리에 같은 게 매달려 있었다. 죽어서 천국에 왔나 싶었는데, 천국이면 이렇게 몸이 무거울 리가 없었다. 몸을 일으키려는데 손이 이상했다. 손가락이 길고, 손톱이 정갈하고, 굳은살 하나 없었다. 십 년 넘게 상자를 나른 손이 이럴 리가 없었다. 내 손은 늘 까지고 갈라지고, 겨울이면 손등이 터서 피가 났다. 그런데 이 손은, 마치 태어나서 노동 한 번 안 해본 손 같았다. 거울로 걸어갔다. 다리도 이상하게 길었고 걸음도 이상하게 가벼웠다. 거울 속에는 은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서늘한 이목구비, 날카로운 눈매, 어딜 봐도 나쁜 짓 하나쯤 벌인 얼굴이었다. 악역이다. 딱 봐도. 거울을 다시 봤다. 아니, 몇 번을 봐도 저 얼굴이 내 얼굴이라니. 손으로 뺨을 만져봤다. 차갑고 매끈했다. 이거 완전 판타지 소설에서 튀어나온 반동인물 얼굴이잖아. 이런 얼굴로 물류창고에서 상자 나르면 사람들이 다 쳐다볼 텐데, 라는 실없는 생각이 스쳤다. "강도현 님, 일어나셨습니까." 문밖에서 누군가 불렀다.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 그런데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나이 든 남자가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은발보다 더 하얗게 센 머리카락, 등이 살짝 굽은 몸, 손에는 오래된 만년필이 들려 있었다. 딱 봐도 이 집에서 몇십 년은 일한 집사 같은 인상이었다. "후작님.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와. 눈뜬 지 오 분 만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건 뭐 개막전부터 결승골 넣는 느낌이었다. 슬퍼할 새도 없었다. 애초에 슬퍼할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이름도 방금 알았다. 이 몸의 기억이 조금씩 흘러들어왔다. 강도현. 이 나라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후작가의 외동아들. 오만하고, 냉정하고, 사용인들 눈도 안 마주치는 인간. 어릴 때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고, 최고의 검술 사범한테 검을 배우고, 원하는 건 다 가지면서 자랐다. 그러면서도 누구에게도 고맙다는 말 한 번 안 하고 산 인간. 그 인간이 지금 나였다. 기억 속에서 이 남자의 삶이 스쳐 지나갔다. 하녀가 실수로 찻잔을 깨뜨리자 임금 두 달치를 깎아버린 장면. 마부가 늦었다고 채찍을 든 장면. 사용인들이 이 남자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 "저 인간 밑에서 못 살겠다"는 말들. 나는 그 기억들을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전생에는 저런 인간들 밑에서 착취당하던 내가, 이번엔 저런 인간의 몸에 들어와 있다니. "장례는 사흘 뒤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전에 처리하셔야 할 서류들이 있습니다." 노인이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상속 문서, 영지 관리 명부, 사용인 급여 지급 대장. 종이 뭉치가 두툼했다. 전생에 계약서 한 장 읽는 것도 벅차했던 나로서는 이게 다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이 몸의 기억이 슬쩍 끼어들면서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라틴어 비슷한 문자였는데 읽는 데 문제가 없었다. 편리하네, 이거. 나는 그걸 받아들며 속으로 웃었다. 좋아. 좋다고. 전생에서 나는 착취당하는 쪽이었다. 시급 몇 백 원 더 준다고 유세 떠는 사장 밑에서, 화장실 갈 시간도 눈치 보면서 살았다. 상자를 나르다 허리를 삐끗해도 산재 처리는 꿈도 못 꿨다. 몸이 부서지도록 일해도 통장에 남는 돈은 몇십만 원이 다였다. 그렇게 이십구 년을 살다가, 지하철 플랫폼에서 발을 헛디뎌서 끝났다. 이번엔 다르다. 이번엔 내가 위에 있다. 귀족, 후작, 이 세계의 갑. 이번엔 내가 부려먹는다. 노인이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눈빛에 뭔가 미묘한 게 있었다. 슬픔인지, 경계인지, 둘 다인지 모르겠는 눈빛. 아마 원래 강도현이 이런 순간에 무슨 표정을 짓는지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표정을 정리하고 최대한 후작스럽게, 그러니까 재수 없게 말했다. "알았으니 나가봐." 노인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나가는 뒷모습이 어딘가 쓸쓸해 보였는데, 그런 걸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침대에 널브러졌다. 천장의 금박 무늬가 눈에 들어왔다. 이 방 하나가 내 전 재산보다 비싸겠지. 아니, 이 침대 시트 한 장이 내 전 재산보다 비쌀 것 같았다. 손끝으로 이불을 만져봤다. 부드러웠다. 전생에 덮던 이불은 세탁을 몇 번을 해도 늘 뻣뻣했는데, 이건 손이 닿는 순간부터 다른 감촉이었다. 좋다. 아주 좋아. 이번 인생은 내가 착취하는 쪽으로 산다. 결심했다. 상자를 나르던 손 대신, 이제는 누군가 나를 위해 상자를 날라주는 삶. 화장실 갈 시간을 눈치 보는 대신, 누군가 내 눈치를 보는 삶. 그렇게 살기로 했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순진한 결심인지 몰랐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