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정적이 흘렀다.
나는 그림자가 사라진 나무 사이를 한참 바라보았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스치며 낮게 울렸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소리였는데, 오늘따라 어딘가 삐걱거리는 듯한 파문이 섞여 있었다.
[주인님, 계속 이동하시겠습니까?]
"...그래야지. 나머지 표식도 확인해야 하니까."
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볍게 냈지만, 손끝에 남은 긴장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숲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계속 주위를 살폈다.
땅을 밟는 소리조차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자리와 그림자가 진 자리가 뚜렷하게 갈라져 있었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림자가 진 쪽을 피해 걸었다.
16번, 17번 표식은 이상이 없었다.
표식 주변의 흙은 단단히 다져져 있었고, 마력의 흐름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걸린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주인님, 심박이 평소보다 높게 측정됩니다.]
"그런가...나도 잘 모르겠어."
나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며 걸음을 늦췄다.
숲 안쪽에서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온한 소리였는데도, 그 리듬이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때, 멀리서 비명이 들렸다.
"으아아악!"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곧바로 방향을 틀어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렸다.
발끝이 땅을 박차는 감각이 선명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전방 200미터, 마력 반응 강함. 접근 중인 대상은 마물로 추정됩니다.]
"종류는?"
[미확인입니다. 다만 크기가... 상당합니다.]
"거리는?"
[좁혀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면 40초 내에 도착합니다.]
숲의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발밑의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나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다리에 힘을 더 실었다.
나무 사이를 헤치고 달려가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마을 아이 하나가 커다란 짐승형 마물에게 쫓기고 있는 장면이었다.
마물은 온몸이 검붉은 비늘로 덮여 있었고, 등에서 검은 안개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비늘 사이로 언뜻 보이는 살갗은 짙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 색이 마치 갓 흘린 피처럼 선명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위장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저건... 마수림 안쪽에서만 나오는 종류인데.)
이 근방에서 볼 수 있는 개체가 아니었다.
어째서 여기까지 나왔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아이는 넘어지며 발을 헛디뎠다.
마물의 앞발이 그 위로 그림자를 덮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날렸다.
탁.
발끝으로 땅을 밀어내며 아이와 마물 사이로 파고들었다.
손목을 비틀어 단검을 앞으로 세웠다.
퍽.
마물의 앞발이 단검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충격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어깨뼈까지 저릿한 통증이 번졌다.
"괜찮아?"
나는 아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이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두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저... 저쪽으로 도망가. 빨리."
아이가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달려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깐 눈으로 좇았다.
아이가 나무 사이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나는 다시 마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물의 눈이 붉게 빛났다.
그 눈빛에서 지금까지 상대했던 마물들과는 다른 이질감이 느껴졌다.
동공의 색이 일정하지 않고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주인님, 이 개체의 마력 수치가 기존 최상급 마물 평균의 1.5배입니다.]
라비의 목소리에 긴장이 섞였다.
"...그렇게 높다고?"
[예. 게다가 마력의 파형이 일반적인 개체와 다릅니다. 인위적인 조작의 흔적이 감지됩니다.]
나는 순간 숨을 삼켰다.
"인위적...이라니. 누가?"
[분석 중입니다. 지금은 전투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라비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답을 찾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단검을 고쳐 쥐며 자세를 낮췄다.
마물이 먼저 움직였다.
앞발이 땅을 박차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옆으로 몸을 굴렸다.
흙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쾅.
마물의 앞발이 방금 내가 서 있던 자리를 내리찍었다.
땅이 갈라졌다.
흙덩이 몇 개가 튀어 올라 뺨을 스쳤다.
(빠르다. 예상보다 훨씬.)
나는 자세를 바로 세우며 손끝에 마력을 모았다.
작은 빛의 검이 손 안에서 형성되었다.
손바닥에서 옅은 열기가 느껴졌다.
마물이 다시 몸을 틀었다.
꼬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나는 몸을 뒤로 젖혀 피했다.
그러나 완전히는 피하지 못했다.
퍽.
꼬리 끝이 어깨를 스쳤다.
뜨거운 통증이 퍼졌다.
"...아."
나는 신음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어깨에서 미약한 피가 배어 나왔다.
옷감이 상처에 스치며 따끔거렸다.
[주인님, 상처가 깊지 않으나 지속적인 접근은 위험합니다.]
"알아. 그래도 물러날 순 없어."
아이가 도망친 방향은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이 마물이 그쪽으로 방향을 틀면 더 큰 피해가 날 것이었다.
아이의 뒷모습이 눈앞에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나는 빛의 검을 고쳐 쥐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발끝에 힘을 주며 땅을 단단히 딛었다.
"라비, 이 개체 약점은?"
[아직 특정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등의 검은 안개가 마력의 근원으로 추정됩니다.]
"등이라...쉽지 않겠네."
마물의 등은 항상 아래로 낮게 숙여져 있었다.
접근하려면 그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파고들어야 했다.
마물이 다시 낮게 울부짖으며 몸을 낮췄다.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자세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손끝이 떨렸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 번 더 버텨야 해.)
숲의 벌레 소리가 순간 뚝 끊겼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그 침묵이, 지금은 유난히 크게 다가왔다.
그때, 마물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짙어졌다.
마치 힘을 응축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안개는 등에서부터 서서히 퍼져 나와 마물의 전신을 감쌌다.
[주인님, 마력 수치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위험합니다.]
"얼마나...?"
[측정 범위를 초과했습니다.]
라비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흔들림이 느껴졌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어떤 마물보다도, 눈앞의 존재가 뿜어내는 압박감이 컸다.
검은 안개가 마물의 형체마저 흐릿하게 만들 정도로 짙어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붉은 두 눈만이 또렷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나는 뒷걸음질 치려던 발을 멈췄다.
마물의 몸이 완전히 검은 안개에 잠식되는 순간, 그 형체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