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날 밤, 서준은 잠들지 못했다.
갓난아기 몸이라 잠이 쏟아졌지만, 낮에 느낀 그 흐름이 자꾸 신경을 긁었다.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거 뭐지.
낮에 젖을 먹다가 문득 느꼈던 그 감각. 몸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스르륵 지나가는 느낌. 서준은 그 감각을 다시 더듬어봤다.
이거 마력 같은데.
확신은 없었다. 전생에 마력이란 걸 실제로 느껴본 적은 없었으니까. 게임에서, 소설에서 수백 번은 봤던 개념이지만 직접 겪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몸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흐르는 느낌은 분명했다.
서준은 그 흐름을 손끝으로 끌어당기듯 집중했다.
푸스스.
손끝에서 작은 바람이 일었다. 이불이 살짝 들썩였다. 방 안이 고요한 새벽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거 진짜네.
서준은 속으로 흥분했다. 갓난아기 몸으로 표정을 지을 수 없다는 게 아쉬울 지경이었다. 이건 흥분해서 웃어야 하는 순간인데, 얼굴 근육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일단 다시.
서준은 다시 한번 시도했다. 이번엔 조금 더 세게 끌어당겼다.
휘이잉.
방 안의 공기가 소용돌이치듯 일었다. 커튼이 펄럭였다. 요람 위에 매달린 모빌이 흔들렸다.
그 순간, 창밖에서 뭔가 작은 존재가 반응했다. 서준은 그 존재의 기척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뭐지, 이 느낌.
사람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그렇다고 물건도 아닌 무언가. 그 기척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창문 틈으로 빛나는 작은 점 하나가 스며들어왔다. 손가락만 한 크기였다. 날개 같은 것이 반짝였다. 빛의 결이 바람을 따라 흔들리듯 일렁였다.
오, 재밌는 애 있네.
목소리가 들렸다. 앙증맞은 톤이었지만 말투는 묘하게 어른스러웠다. 서준은 눈을 크게 떴다.
너 정령이야.
그럼 뭐겠어. 산타클로스인 줄 알았니.
작은 존재가 팔짱을 끼며 허공에 떠 있었다. 바람으로 이루어진 듯 몸의 윤곽이 흐릿했다.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 같은 것도 있었다. 바람에 날리듯 계속 흔들리는 머리카락.
서준은 순간 기대에 부풀었다. 정령이라니. 이건 확실히 좋은 신호였다.
대정령이야?
뭔 소리야. 나 그냥 바람 정령이야. 이름은 소이.
서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갓난아기 얼굴이라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미묘한 변화였지만, 서준 본인은 확실히 실망했다.
대정령을 기대했는데 그냥 바람 정령이라니, 어딘가 김이 빠졌다.
그럼 별로 안 센 거네.
야, 사람 앞에 두고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소이가 눈을 치켜뜨며 쏘아붙였다. 팔짱을 낀 채로 허공에서 붕 떠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화가 났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는 몸짓이었다.
서준은 갓난아기 몸이라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는데 입에서 나오는 건 그냥 웅얼거리는 소리였다.
미안. 근데 기대를 좀 했거든.
기대는 좋은데, 나 얕보면 안 돼. 대정령이 다는 게 아니야.
소이가 허공에서 빙그르 돌았다. 작은 몸에서 은근한 자신감이 뿜어져 나왔다.
너 방금 마력 다루는 거 봤는데, 그거 갓난아기가 하면 안 되는 거야.
왜 안 돼.
보통 다섯 살 넘어야 마력 감지가 되거든. 너는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흐름을 느껴.
서준은 그 말에 속으로 놀랐다. 다섯 살이라니. 자기는 태어난 지 며칠도 안 됐다.
전생의 기억이 있다는 걸 밝힐 수는 없었다. 정령이 뭘 어떻게 알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괜히 캐물음을 자초할 이유가 없었다.
그냥 타고났나 보지.
타고난 것도 정도가 있지. 너 뭔가 좀 이상해.
소이가 서준의 얼굴 앞으로 다가와 뚫어지게 쳐다봤다. 눈이 반짝반짝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 조그만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서준은 아기 특유의 초점 없는 눈으로도 어떻게든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이상한 애다.
들키면 안 되는데.
근데 뭐, 재밌으니까 봐줄게. 내가 좀 도와줘도 될 것 같은데.
소이가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의심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흥미로 물들었다.
도와준다고?
마력 다루는 법. 정령이랑 소통하는 법. 그런 거 가르쳐줄 수 있어.
서준은 눈을 반짝였다. 대정령이 아니라 실망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뒤집혔다.
이거 완전 개꿀이잖아.
너 생각보다 아는 게 많나 보네.
당연하지. 내가 나이가 몇인데.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큰코다쳐.
소이가 팔짱을 낀 채 자랑스럽게 말했다. 몸을 한껏 부풀리듯 세우는 자세였는데, 원래 크기가 손가락만 해서 별로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서준은 그 태도가 어딘가 재수 없으면서도 믿음이 갔다.
그럼 잘 부탁해.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나 심심할 때 놀아줘야 돼. 그리고 맛있는 거 생기면 나눠줘.
서준은 실소했다. 정령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소박한 조건을 내걸다니 어이가 없었다.
대정령급 능력을 기대했더니 놀아달라는 말이나 하고.
먹을 걸 어떻게 나눠줘, 나 지금 아기인데.
크면 되지. 나 기다리는 거 잘해.
소이가 서준의 코끝에 살짝 앉았다. 작은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깃털 하나가 얹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준은 그 순간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시작인가.
앞으로 잘 지내보자.
좋아. 근데 너, 내일부터 진짜 수련 들어간다. 각오해.
소이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방금까지의 장난스러움과는 다른, 진지한 기색이 스쳤다.
서준은 그 표정 변화에 살짝 긴장했다.
뭘 그렇게 각오까지 해야 되는데.
소이는 대답 없이 씩 웃기만 했다.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졌지만, 그 웃음 속에 뭔가 불길한 게 섞여 있었다.
창밖의 새벽 공기가 서늘하게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서준은 코끝에 앉은 소이를 곁눈질로 바라봤다. 저 조그만 게 뭘 시킬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수련이라니.
갓난아기한테 무슨 수련을 시키겠다는 건지,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일이 두려워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