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아기 마법사의 두 번째 삶

1화

형광등이 깜빡였다. 지지직. 낡은 배선이 오래된 건물이라는 걸 증명하듯 소리를 냈다. 김도윤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시계는 밤 열한 시를 넘기고 있었다. 사무실 안은 조용했다. 다들 퇴근한 지 오래였다. 남은 건 김도윤과 이준혁, 그리고 저 멀리 탕비실에서 흘러나오는 정수기 소리뿐이었다. 옆자리 이준혁이 커피를 홀짝이며 한숨을 쉬었다. 선배, 이거 오늘 안에 끝나긴 하는 거예요. 끝내야 끝나는 거지. 김도윤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손가락은 여전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화면 속 엑셀 시트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셀 하나를 채우면 다음 셀이 기다리고 있었다. 삼 년째 이런 밤이었다. 매번 야근이었고 매번 성과는 남의 몫이었다. 부장이 발표할 때 자기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엔 억울했다. 나중엔 그냥 무감각해졌다. 감각이 무뎌지는 것도 습관이 되면 편했다. 이준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선배, 이거 김 부장님 이름으로 올라가는 거죠. 몰라서 물어. 알죠. 알아서 슬픈 거지. 이준혁이 키보드에 이마를 박을 듯이 고개를 숙였다. 김도윤은 피식 웃었다. 웃음이라기엔 힘이 없었다. 부장이 다가온 건 그때였다. 발소리가 먼저 들렸다. 무거운 구두 소리. 사무실 바닥을 밟는 소리치고는 유독 신경을 긁는 소리였다. 김도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저 발소리의 주인이 좋은 얘기를 갖고 오는 법은 없었다. 한 대리, 이거 왜 아직도 안 끝났어. 부장의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 김도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뭔가 스위치가 눌린 기분이었다. 삼 년 동안 누른 적 없던 스위치였다. 어디 숨어 있었는지도 몰랐던 스위치였다. 부장님이 어제 다섯 시에 시켰잖아요. 그래서.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거죠. 부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사무실 안이 조용해졌다. 이준혁이 숨을 죽이고 이쪽을 쳐다봤다. 다들 알고 있었다. 김도윤은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김도윤도 알고 있었다. 원래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는 걸. 말투가 그게 뭐야. 말투가 왜요. 사실을 말한 건데. 부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뭔가 말을 하려다 삼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삼 년 동안 저 표정 앞에서 고개를 숙였던 자신이 생각났다. 이제와서 뭐가 아까운가 싶었다. 너 요즘 회사 생활 그렇게 하는 거야. 회사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요. 부장이 말을 잃었다. 김도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김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미리 써둔 사직서였다. 언제부터 넣어뒀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아마 첫 야근을 하던 날부터였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부장의 이름으로 올라가는 첫 보고서를 봤던 날부터였을지도. 이거 오늘까지 일한 걸로 처리해주십시오. 부장의 눈이 커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보시는 대로입니다. 김도윤은 종이를 부장의 손에 정확히 쥐여줬다. 부장이 그걸 받아 들고도 무슨 물건인지 이해를 못 하는 얼굴이었다. 김도윤은 가방을 챙겼다. 손이 떨렸지만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사무실을 나서는데 등 뒤로 부장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너 이러고 나가면 재취업 못 해.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문이 닫혔다. 탁.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형광등 불빛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삼 년 동안 걸었던 복도였는데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낯설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준혁이 뛰어왔다. 선배, 진짜 나가는 거예요. 어. 와, 진짜로. 이준혁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얼굴에 놀라움과 부러움이 반쯤씩 섞여 있었다. 그렇게 나가면 진짜 후회 안 해요. 후회는 지금 안 하고 나중에 하는 거지. 대단하다. 저는 그런 말 절대 못 하는데. 이준혁의 얼굴에 묘한 경탄이 어렸다. 김도윤은 피식 웃었다. 너도 언젠가는 하게 될 거야. 참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 한계가 언제 오는데요. 몰라. 나도 오늘 알았어. 이준혁이 작게 웃었다. 웃음 끝에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띵. 김도윤은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이준혁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을 흔들지도 않았다. 그냥 서서 지켜봤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속은 후련하지 않았다. 삼십 년을 참고 살았다. 부모님 말에 참고, 학교에서 참고, 회사에서 참고. 참는 게 미덕이라고 배웠다. 근데 그 미덕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다줬는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았다. 삼 년째 야근에, 삼 년째 남의 이름으로 올라가는 성과에, 삼 년째 똑같은 하루.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김도윤은 사직서를 낸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후련해야 하는데 후련하지 않았다. 뭔가 빠진 느낌이었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로비를 지나 회사 밖으로 나오니 밤바람이 찼다. 편의점 불빛이 눈을 찔렀다. 늦은 시각인데도 도로에는 차가 꽤 지나다녔다. 택시 몇 대, 버스 한 대, 그리고 저 멀리 헤드라이트 하나. 도로를 건너려는데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었다. 김도윤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두 통 와 있었다. 하나는 어머니, 하나는 모르는 번호. 어머니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아직 정리가 안 됐다. 회사 그만뒀다고, 그것도 오늘 밤에 갑자기 그만뒀다고 하면 뭐라고 하실지 눈에 그려졌다. 발을 뗐다. 그때 헤드라이트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부아아아앙. 브레이크 소리는 나지 않았다. 몸이 붕 떠오르는 감각이 있었다. 시간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 편의점 불빛이, 신호등의 초록빛이, 방금까지 걷던 도로의 아스팔트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가 흩어졌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김도윤의 생각은 딱 거기서 끊겼다. 마지막으로 떠올린 건 사직서를 낸 순간의 후련함이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는 것을, 눈을 감기 직전에야 깨달았다. 삼십 년 동안 참았던 것치고, 후련함은 너무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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