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빛이 눈꺼풀을 뚫고 들어왔다.
한서준은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했다.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팔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팔을 뻗으려 했다. 손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발을 움직이려 했다. 다리가 제멋대로 꿈틀거렸다.
내 몸이 아니야.
생각은 또렷한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갓난아기의 몸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신이 경고한 대로였다.
각오하라더니 진짜였네.
빙의라는 게 이런 거였나. 서른이 넘도록 회사에 갇혀 살다가 갑자기 눈을 떠보니 팔다리도 못 가누는 핏덩이라는 거. 억울하다는 감정보다 실감이 먼저 왔다. 몸이 안 움직이는 게 이렇게 답답한 일이었나.
위에서 얼굴 하나가 내려다봤다. 젊은 여자였다. 따뜻한 눈매에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서준아, 엄마 여기 있어.
이지은이었다. 서준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본능처럼 각인돼 있었다. 몸에 새겨진 정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서준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갓난아기치고는 지나치게 진지한 눈빛이었다.
이 아기 왜 이렇게 눈빛이 어른스러워.
이지은이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서준은 속으로 뜨끔했다.
너무 뚫어져라 봤나.
표정을 관리할 방법이 없었다. 아기의 근육은 미묘한 조절이 안 됐다. 웃으려 해도 입꼬리가 이상하게 실룩거릴 뿐이었다. 찡그리려 해도 얼굴 전체가 구겨지는 게 다였다.
이거 표정 연습부터 해야겠는데.
그때 옆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어른스러워. 그냥 눈이 큰 거지.
한도진이었다. 건장한 체격에 피부가 볕에 그을려 있었다. 노동으로 다져진 몸이 한눈에 보였다. 팔뚝에 잡힌 근육이 이불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가 서준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아빠 손 잡아봐.
서준은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힘이 생각보다 세게 들어갔다. 한도진의 눈이 커졌다.
야, 이 녀석 손힘 좀 봐라.
건강한 거지, 좋은 거네.
이지은이 웃으며 서준의 볼을 쓰다듬었다. 손끝이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 손길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전생에는 없던 감각이었다.
이게 부모라는 건가.
서준은 속으로 생각했다. 삼십 년을 회사에 갇혀 살았던 전생과는 완전히 다른 온도였다. 야근과 회의, 상사의 잔소리로 가득했던 그 시간들. 지금 이 순간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이런 걸 느껴본 적이 없었지.
한도진이 서준의 손가락을 흔들었다. 서준은 저항 없이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며 한도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 녀석, 나중에 힘 좀 쓰겠는데.
이지은이 눈을 흘겼다.
애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뜨는데 무슨 힘 얘기야.
방문이 벌컥 열렸다.
쾅.
엄마, 나 동생 봐도 돼?
어린 여자아이가 뛰어들어왔다. 한서연이었다. 아버지를 닮은 이목구비가 또렷했다. 눈빛에는 호기심과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신발을 벗다 말고 뛰어온 듯 한쪽 발이 아직 양말 신은 채였다.
조심히 봐야 해, 서연아.
알아, 알아.
서연이 서준의 얼굴 앞에 자기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을 크게 뜨고 요모조모 살폈다. 코와 코가 거의 닿을 듯한 거리였다.
얘 되게 신기하게 쳐다보네.
서준은 순간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갓난아기의 목은 그렇게 자유롭지 않았다. 서연의 눈에 계속 붙잡혔다.
시선 좀 피하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들었다. 목을 돌리려 해도 몇 도 움직이는 게 전부였다. 서연의 얼굴이 계속 정면에 있었다.
엄마, 얘 원래 이런 눈빛이야?
글쎄, 좀 특이하지.
이지은이 웃으며 답했다. 서연이 손가락으로 서준의 손을 쿡쿡 찔렀다.
야, 오빠. 아니, 동생아. 나 알아보겠어?
당연히 모르는 척해야지.
서준은 그 대화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표정 관리는 나중에 배워야겠다. 이 몸으로 뭘 어떻게 숨겨야 할지 감이 안 잡히긴 하지만.
방 안의 공기는 따뜻했다. 볕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방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그렸다. 먼지 몇 알이 그 빛줄기 속에서 천천히 떠다녔다. 서준은 그 온기 속에서 낯선 편안함을 느꼈다.
이게 두 번째 인생이라는 건가.
전생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물리적인 온도로 다가온 적이 없었다. 회사 책상 앞에서, 야근하던 사무실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풍경이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시작인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몸속 깊은 곳에서 뭔가 미묘한 감각이 꿈틀거렸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흐름 같은 것이었다. 배 속에서 시작해 팔을 타고 손끝까지 퍼지는 느낌이었다.
뭐야, 이거.
서준은 본능적으로 그 감각을 따라가 보려 했다. 손끝이 저절로 움직였다. 손가락을 펼쳤다가 다시 오므렸다. 그 동작을 따라 방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일렁이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인가.
이지은이 그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어. 방금.
한도진도 서준 쪽을 쳐다봤다. 방 안의 공기가 아까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던 볕줄기가 살짝 흔들린 것 같기도 했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이 스쳤다.
뭐가 이상한데.
한도진이 미간을 좁혔다. 서연도 그 분위기를 느꼈는지 서준을 쳐다보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엄마, 방금 뭐였어?
몰라. 그냥 바람인가.
이지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확신 없는 말투였다. 서준은 그 시선들 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방금 느낀 흐름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이거 진짜 뭐지.
가슴 속에서 그 흐름이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아까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서준은 눈을 감은 채로 그 감각에 집중했다. 무언가 대답이 나올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