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히든보스로 오해받는 7일

5화

[D-3] 나흘째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어젯밤 서재에서 들은 이름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백강호. 검성. 원작 게임 설정집에서 딱 한 줄 언급된 이름이었다. '왕국 최강의 검사, 그가 등장하면 서사의 축이 바뀐다.' 솔직히 말해서 이건 서브 캐릭터 소개란에도 안 들어갈, 그냥 세계관 설정 텍스트에 스쳐 지나가듯 박혀 있던 문구였다. 근데 그 문구 하나 붙잡고 이 세계관은 참 성실하게도, 진짜 그 사람을 데려오려는 모양이었다. 이런 거창한 존재를 왜 아버지가 편지로 부르는 걸까. 회사로 치면 대표이사가 갑자기 업계 전설 은퇴한 기술고문을 컨설팅으로 불러들이는 느낌인데, 그 컨설팅 대상이 나라는 게 문제였다. 일단 훈련을 계속했다. 불안하다고 누워서 이불 뒤집어쓰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도 최도경과 검술 수업이 있었지만, 그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존댓말이 더 조심스러워졌고, 눈빛에 뭔가 경외감 같은 게 섞여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도련님, 자세가 그게 아닙니다" 하고 팍팍 지적하던 사람이, 오늘은 내가 검을 쥐는 것만 봐도 흠칫하는 눈치였다. "도련님, 오늘은 가볍게 몸만 풀겠습니다." "어제처럼 하시면 되는데요." "...아닙니다. 그, 오늘은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지 이 조심스러움. 사람이 하루 사이에 이렇게 바뀔 수 있나? 꼭 어제까지 반말하던 거래처 대리가 갑자기 내가 임원 친인척이라는 걸 알고 존댓말로 갈아탄 그런 느낌이었다. 검을 몇 번 휘둘러보는 척했더니 최도경은 그마저도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그,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예. 충분해요." 아니 뭐가 충분한데. 나는 아직 자세도 제대로 안 잡았는데. 수업 중간에 하윤이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건넸다. "도련님, 잠시 시간 되십니까." "네, 무슨 일이세요?" 하윤은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당주님께서, 검성님을 초빙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진짜요?" "네. 편지가 오늘 아침 출발했습니다." 올 것이 왔다. 검성이라니, 이건 진짜 상상도 못 한 전개였다. 그냥 아홉 살 몸으로 벼락치기 훈련하다가 갑자기 왕국 최강자가 등장하는 이벤트로 번지는 거였다. 드라마로 치면 이제 막 회사에 입사한 신입이 첫 주에 사장님 직속 면담을 잡히는 꼴이었고, 그 사장님이 하필 업계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거였다. 숨이 턱 막혔다. "저기, 왜 검성님까지..." "당주님께서는 도련님의 진짜 실력을 확인받고자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윤의 목소리에 미묘한 무게가 담겨 있었다. "제 진짜 실력요? 저 그냥 초보인데요." "...도련님." 하윤이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저는 도련님을 오랫동안 모셨습니다. 도련님이 평범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이미 느끼고 있습니다." 와, 이거 진짜 큰일이다. 평범한 게 아니라는 게 아니라, 나는 그냥 다른 세계에서 온 아저씨 영혼이 들어 있을 뿐이라고요. 하지만 그걸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사실 저는 서른두 해 회사 생활하다가 죽어서 이 몸에 들어온 겁니다' 라고 말하면 하윤이 믿어줄까? 아마 믿기는커녕 신전에 데려가서 정신 감정을 받게 할 것 같았다. "저 진짜 평범해요. 진짜로요." "...알겠습니다." 하윤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지만, 그 표정은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뭔가 확신을 굳히는 표정이었다. 아, 이거 부정할수록 더 의심스러워지는 그 흔한 클리셰 아닌가. "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가 제일 수상한 대답이라는 걸 나도 안다. 근데 진실을 말할 수 없으니 어쩌겠나. 그날 오후, 나는 저택 서재로 몰래 향했다. 무진혁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책상 위 서류를 살짝 훔쳐봤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누가 보면 몰래 남의 인사 서류 뒤지는 회사원 같았을 텐데, 실제로도 딱 그런 느낌이었다. [검성 백강호 초빙 요청서] [사유: 셋째 아드님의 특이 사항 확인] [요청: 극비 방문] 특이 사항이라니. 서류를 읽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 걸까. 이 정도면 인사평가서에 '특이사항: 관찰 요망' 도장 찍힌 수준인데. 회사에서 이런 도장 찍히면 보통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승진 대상이 아니라 감사 대상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서류를 조심스럽게 원래 자리에 되돌려놓으면서, 나는 무진혁의 필체를 다시 한번 훑어봤다. 글씨가 평소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 급하게, 그러나 신중하게 눌러 쓴 흔적. 이 사람도 뭔가에 쫓기듯 이 편지를 썼구나 싶었다. 아버지 나름대로도 이건 도박이었던 거다. 그날 밤, 나는 결심했다. 검성이 오기 전에, 이 오해를 어떻게든 풀어야 한다고. 하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도 들었다. 검성이라는 존재, 원작 최강자. 만약 그가 정말 내 훈련을 좀 봐준다면, 오히려 살아남을 확률이 올라가는 게 아닐까. 갈등이 시작됐다. 오해를 풀어서 조용히 지내는 것과, 오해를 이용해서 강해지는 것. 서른두 해 회사 생활로 다져진 현실주의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사흘 뒤에 늑대 떼와 마주해야 한다. 오해든 뭐든, 살아남는 게 최우선이었다. 이건 뭐 신입사원이 억울하게 능력자로 오해받아서 팀장 자리 제안받았을 때 굳이 "저 사실 그냥 무능합니다" 하고 정정할 필요가 있나 없나 하는 고민이랑 똑같았다. 정정 안 하면 승진하고, 정정하면 원래대로 돌아가는데, 나는 승진이 아니라 생존이 걸려 있으니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거였다. "...그래, 일단은 이용하자." 비겁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양심이 살짝 쿡쿡 찔렀지만, 그 양심을 달래는 방법도 간단했다. '죽으면 양심도 없다'는 아주 명료한 논리였다. 그런데 방으로 돌아가는 길, 창밖을 보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저택 정문 쪽에 낯선 마차가 서 있었다. 검은색, 문양 없는 심플한 마차였지만, 그걸 끄는 말들의 자세부터가 이상했다. 말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치 뭔가 거대한 것 앞에서 잔뜩 얼어 있는 듯한 자세였다. 마차 자체가 조용히 위압감을 뿜고 있었다. 저게 무슨 마차인가, 저건 그냥 탈것이 아니라 뭔가 상징 같았다. "저건 뭐지." 하윤이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벌써 도착하셨나 봅니다." "누가요?" "검성님이십니다." 뭐? 편지가 오늘 아침에 출발했다고 했는데, 벌써 도착이라니. 아니 이 세계 우편 시스템이 아무리 후져도 그렇지, 이건 좀 너무 빠른 거 아닌가? 배달앱 로켓배송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이야. "편지가 도착하기도 전에 오신 거예요?" "...아마 다른 방법으로 미리 소식을 접하셨겠지요." 하윤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검성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런 분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설명인가. 근데 하윤의 표정을 보니 더 캐묻기가 무서워졌다. 평소 침착하기만 하던 그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 그건 존경과 두려움이 반쯤 섞인, 아주 익숙한 표정이었다. 회사에서 임원이 예고 없이 현장 순시 나왔을 때 팀장들이 짓는 그 표정이랑 똑같았다. [관찰자 하윤] 검성 백강호. 왕국에서 가장 많은 검을 본 자, 그리고 가장 많은 재능을 알아본 자. 그가 이렇게 빠르게 움직였다는 것은, 이미 무진 가문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소문이 왕국 어딘가에서 흘러 다니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어린 도련님의 새벽 훈련, 날아오는 병을 잡아낸 반사속도,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그것을 감추려는 결의. 하윤은 그 모든 조각들이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만들고 있다는 확신이 점점 강해졌다. 도련님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무진 가문 전체의 운명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일지 모른다. 하윤은 그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마차 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이이익. 경첩 소리마저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안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걸음걸이 하나하나에서 뭔가 다른 무게가 느껴졌다. 백발에 가까운 은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 허리에는 소박해 보이는 검 한 자루. 그 흔한 화려한 장식도, 위압적인 갑주도 없었다. 그런데도 저택 정문에 서 있는 그 자체만으로 공기가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꼭 아무 로고도 없는 무지 티셔츠를 입었는데 왠지 모르게 명품 같은 그런 느낌. 아니 이 비유가 지금 상황에 맞나 싶지만, 실제로 그랬다. 그가 저택 앞에 서서 조용히 나를 바라봤다. "...이 아이인가." 낮은 목소리였다. 등줄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검성의 눈빛이 나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 시선 속에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뭔가를 확인하려는 예리한 날이 서 있었다. 마치 내가 무슨 특별 할인 상품인지 하자 있는 반품 상품인지, 그 자리에서 정밀 감정이라도 하려는 눈빛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도망칠까? 아니, 그럴 수도 없었다. 저 사람이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나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붙잡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이미 저 시선 안에 완전히 붙잡혀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정말, 도망칠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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