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새벽마다 몰래 훈련하기로 결심한 지 이틀째였다.
[D-6]
숫자가 하나 줄어드는 걸 보니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일단 목검 휘두르는 것부터 시작했다.
근데 이게, 서른두 살 아저씨 정신머리로 아홉 살 몸을 굴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팔이 말을 안 들었다.
뻐끔.
입은 벌렸는데 소리가 안 나왔다. 숨이 차서.
"와, 이거 헬스장 PT 첫날보다 더하네."
혼자 구시렁대다가 목검을 놓칠 뻔했다.
생각해보니 헬스장 PT 첫날에는 트레이너가 물이라도 줬다.
여기는 아무도 없었다.
새벽 정원엔 나 혼자, 그리고 이슬 맞은 잔디랑 목검 하나.
서른두 살 인생 통틀어 가장 처량한 헬스 인증샷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었을 거다.
근데 인증샷 찍어줄 사람도 없다는 게 더 처량했다.
그래도 회사원 강도윤은 벼락치기의 화신이었다.
효율을 계산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무작정 휘두르지 않고, 기본 동작 하나만 반복했다.
찌르기.
그거 하나만 죽어라 반복했다.
왜냐면 원작 설정집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이터널 크로니클의 전투 시스템은 '기초 숙련도'가 낮으면 스킬 자체가 발동 안 되는 구조였다.
반복 숙련이 곧 스탯이었다.
게임할 때는 그냥 노가다 파트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게 내 목숨줄이었다.
이게 무슨 코미디인가 싶었다.
회사에서 반복 업무 죽어라 시키던 부장님이 여기 계셨으면 아마 좋아하셨을 거다.
"강도윤씨, 이거 그냥 복붙이야. 창의력 쓰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
그 말이 여기서도 통할 줄이야.
인생이란 게 참, 어디 가나 노가다는 노가다구나 싶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찔러.
찔러.
찔러.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팔이 후들거리다가, 결국 목검을 놓쳤다.
쿵.
목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새벽 정원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아 시발..."
입에서 튀어나온 욕에 나조차 놀랐다.
아홉 살 몸에서 나온 욕이 너무 안 어울려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다시 목검을 주웠다.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까진 건 아니었지만, 물집이 잡히려는 초기 단계 같았다.
서른두 해 동안 마우스랑 키보드만 만지던 손이었다.
목검 손잡이의 감촉이 낯설었다.
근데 이상하게, 아프면서도 어딘가 짜릿했다.
'와, 나 진짜 이세계 온 거 맞구나' 하는 실감이 손바닥 통증을 타고 올라왔다.
좋은 실감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촤악.
나뭇잎 밟는 소리.
뭐지?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목검을 쥔 손에 힘이 확 들어갔다.
누구지, 설마 벌써 늑대인가.
아니 늑대가 나뭇잎을 그렇게 조심스럽게 밟을 리가.
돌아보니 저택 시녀복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어깨까지 오는 단발머리, 무표정한 얼굴, 이제 막 스물을 넘긴 듯한 앳된 인상이었다.
하윤이었다.
무진 가문에서 나를 전담하는 메이드.
원작에서는 딱히 비중 없는 배경 NPC였는데, 지금 보니 눈빛이 보통이 아니었다.
저 무표정, 저 서 있는 자세.
NPC 주제에 왜 저렇게 카메라 앵글 잘 잡는 각도로 서 있는 건데.
"도, 도련님?"
하윤이 살짝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 시간에 어찌 여기 계십니까."
식겁했다.
들켰다.
순간 오만 가지 변명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몽유병입니다' '악몽을 꿔서 산책 나왔습니다' '별 보러 나왔다가 갑자기 검이 손에 잡혀서' 아니 이것들 다 너무 구려.
특히 마지막 건 그냥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은 변명이었다.
결국 나온 말은.
"...무서워서요."
진심이었다.
일주일 뒤에 늑대한테 죽는다는 게 안 무서울 수가 없었다.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서웠다. 하윤이 나를 어떻게 볼지가.
하윤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무엇이 무섭습니까?"
"...몰라요. 그냥, 도망칠 힘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목검을 다시 고쳐 잡으며 말했다.
최대한 아홉 살짜리 애가 할 법한 말투로 순화하려고 애썼지만, 이미 뉘앙스가 너무 심각했다.
아, 망했다.
아홉 살짜리가 저런 말투로 저런 소리를 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잖아.
근데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방법이 없었다.
하윤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묘하게 무거웠다.
[하윤 관찰 로그: 도련님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 무언가를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대비하려는 결의가 엿보인다.]
아, 이건 시스템 메시지가 아니라 그냥 내 상상이겠지.
근데 하윤 표정이 진짜로 저런 표정이었다.
사람 눈빛만 보고 저렇게까지 진지해질 수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지금 너무 오버해서 받아들이는 건가.
둘 다일 수도 있겠다.
"...알겠습니다."
하윤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검을 쥐는 법부터 다시 봐드리겠습니다. 그 자세로는 손목을 다치십니다."
오, 이건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메이드가 검술을 안다고?
잠깐, 이거 혹시 원작에서 놓친 떡밥인가.
아니 원작에서 하윤은 그냥 도련님한테 차 갖다주고 이불 정리해주는 역할 아니었나.
분량이 워낙 없어서 기억도 잘 안 나는데, 검을 쥔다는 묘사는 확실히 없었다.
"하윤 님이 검을 쓸 줄 아세요?"
"...조금."
대답이 짧았다.
뭔가 더 있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지금 그것보다 당장의 생존이 더 급했다.
캐릭터 서사고 뭐고,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 했다.
하윤이 다가와 내 손을 잡고 목검 쥐는 자세를 고쳐줬다.
"손목을 이렇게, 팔꿈치는 붙이시고."
손이 차가웠다. 새벽바람 때문인가,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인가.
잡는 손길이 은근히 야무졌다.
이게 그냥 시녀 일 하다가 배운 자세는 아닐 것 같은데.
자세를 고치자 확실히 힘이 덜 들었다.
"오, 이거 편한데요."
"...기초가 잘못되면 나중에 큰 부상으로 이어집니다."
말투는 딱딱한데 손끝은 되게 조심스러웠다.
사람이 참 앞뒤가 안 맞는다 싶으면서도, 그 부조화가 이상하게 신뢰가 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찔러, 회수, 찔러, 회수.
서른두 해 회사 생활로 다져진 인내심이 여기서 빛을 발했다.
힘든 반복 노동에 익숙한 몸이었으니까, 정신적으로는.
몸은 여전히 아홉 살이라 후들거렸지만.
중간에 하윤이 자세를 몇 번 더 잡아줬다.
그때마다 손이 스치는 감촉이 어색해서 나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아니 서른두 살 정신에 아홉 살 몸이라 이런 것도 묘하게 민망했다.
정체성 혼란이 이런 데서 온다는 걸 이세계 와서야 알았다.
하윤이 슬쩍 눈을 좁혔다.
"도련님, 방금 그 동작... 다시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이거요?"
찌르기를 한 번 더 했다.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그냥 아까 배운 자세대로 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하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아니면 너무 잘해서 문제인가.
설마 후자일 리가.
*
[관찰자 하윤]
방금 그 찌르기 동작에는 아무런 힘도 실려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힘이 지나치게 억제되어 있었다.
마치 자기 안의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누르고 있는 것처럼.
어린아이가 반복 연습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균형감이 아니었다.
검을 처음 잡는 자의 동작이라 하기엔, 축이 지나치게 안정적이었다.
하윤은 소리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홉 살 도련님의 팔은 분명 후들거리고 있었다. 숨소리도 거칠었고, 자세는 서투른 초심자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서투름 속에 뭔가가 숨어 있었다.
힘을 아끼는 것도 아니고, 못 내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억누르고 있는 듯한 그런 기묘한 감각.
마치 어른의 정신이 아이의 몸에 억지로 맞춰 걷는 걸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지만, 하윤은 그 상상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도련님이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
"아, 저 이제 힘들어서 그만할래요."
나는 목검을 내려놓고 헐떡였다.
진심으로 힘들어서 한 말이었는데, 하윤은 그런 나를 이상하게 진지한 눈으로 쳐다봤다.
"...도련님."
"네?"
"조심하십시오."
"뭘요?"
하윤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숙였다.
뭐야,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저렇게 끝내는 거.
드라마도 이렇게 성의 없이 안 끊는데.
근데 물어봐도 대답 안 해줄 것 같은 분위기여서 그냥 넘어갔다.
지금은 저것보다 당장 팔에 감각이 없는 게 더 급했다.
동틀 무렵,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등 뒤에서 하윤의 발소리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그냥 사뿐사뿐 걸었을 것 같은데, 오늘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뭔가 다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뭔지 모르지만 이 사람,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설마 아니겠지.
설마.
복도를 지나며 창밖을 슬쩍 봤다.
저택 정원 너머로 해가 붉게 걸려 있었다.
[D-6]
숫자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하루가 벌써 절반쯤 지나갔는데도 숫자는 줄지 않았다.
당연했다, 아직 자정이 안 지났으니까.
근데 그 당연한 사실이 오늘따라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방문을 닫으며 생각했다.
찌르기 하나로는 안 된다.
뭔가 더 있어야 한다.
근데 그 '뭔가'가 뭔지는, 나도 아직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