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히든보스로 오해받는 7일

1화

눈을 떴다. 천장이 낯설었다. 원목으로 짠 서까래에 레이스 달린 캐노피까지, 딱 봐도 재벌집 도련님 침실 인테리어였다. 침대 시트는 또 왜 이렇게 부드러운지, 손끝에 닿는 감촉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다. 뭐지? 분명 어제까지 나는 여의도 어느 회사 파티션 안에서 야근을 하고 있었는데. 정확히는 3분기 실적 보고서 엑셀 시트를 붙잡고, 상무님이 "이 숫자 좀 예쁘게 만들어봐"라는 알 수 없는 요구를 소화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기억은 없다. 필름이 끊긴 것처럼 뚝, 잘려나간 느낌이었다. [이터널 크로니클: 대륙력 1023년, 변경백 무진 가문의 셋째 도련님 무진결] 머릿속에 팝업창처럼 문장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야, 이거 뭔데. 나 방금까지 분명 엑셀 시트 붙잡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중세 유럽풍 판타지 저택 시스템 알림이 뜨냐. 이거 무슨 스팀 신작 게임 튜토리얼도 아니고. 심지어 로딩 화면도 없이 그냥 뇌에 직결로 박히는 이 UX, 개발자 누구야. 손을 들어 봤다. 작았다. 조막만 한 손가락 다섯 개가 눈앞에서 꼼지락거렸다. 손톱 밑에는 때 하나 없이 깨끗했고, 손등은 뽀얗다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뽀얬다. 서른둘 인생 강도윤의 손은 키보드 자국과 마우스 콜(callus)로 거칠어져 있었는데, 이건 그냥 아기 손이었다. 으악.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지를 힘도 없었다. 목소리를 내려고 하면 새된 소년 목소리가 나올 게 뻔했고, 그 사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서른둘 인생 강도윤이, 아홉 살짜리 몸에 들어와 있었다. * 정리를 좀 해보자. 나는 강도윤이었다. 서른둘. 미혼. 야근이 취미가 아니라 강제노동이었던 대기업 계약직. 매달 나가는 월세와 통신비, 넷플릭스 구독료를 제하고 남는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그야말로 평범한 대한민국 직장인이었다. 유일한 취미가 게임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이터널 크로니클'이라는 방치형 오픈월드 롤플레잉에 시간을 갈아 넣었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방치 수익 확인하고, 퇴근길에는 자동사냥 켜놓고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런 게임이었다. 스토리 몰입도가 미쳤다는 게임이었다. 커뮤니티에서도 "이 게임은 서브 NPC 한 명 한 명한테도 서사가 있다"고 극찬하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게임의 조연으로 들어와 있었다. 무진결. 이름을 곱씹자 머릿속에서 뭔가 딸깍, 소리를 내며 맞춰졌다. 마치 오래된 폴더에서 파일 하나를 찾아낸 느낌이었다. 원작 게임을 3회차까지 돌린 나는, 이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초반 튜토리얼 구간, 플레이어가 흑랑산 검은 늑대 무리 토벌을 나가는 퀘스트. 그 산기슭 마을 영주의 셋째 아들이 늑대 떼에게 습격당해 죽는다. 그게 무진결이었다. 비중은 딱 한 컷짜리 CG였다. 피 흘리며 쓰러진 소년의 삽화, 그리고 플레이어의 분노 게이지 상승 이벤트. "이 참혹한 광경을 보고 당신은 흑랑을 향한 복수심에 사로잡힌다"는 나레이션 한 줄과 함께, 플레이어 캐릭터의 전투력 버프가 붙는 그런 구성이었다. 말 그대로 스토리 진행을 위한 소모품 캐릭터였다. 이름 있는 엑스트라, 딱 그 정도. [퀘스트 알림: 흑랑산 습격, D-7] 또 떴다. 이번엔 진짜 게임처럼 날짜 카운트다운까지 붙었다. 심지어 폰트도 게임 UI랑 똑같았다. 일주일. 딱 일주일 뒤에 나는, 정확히는 이 몸의 원래 주인은, 늑대 이빨에 목이 뜯겨서 CG 한 장으로 산화할 예정이었다. "...미친." 혼자 중얼거렸는데 목소리가 너무 앳돼서 더 절망스러웠다. 성대가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목에서 나오는 새된 소리라니, 이건 좀 웃프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서른둘 아저씨의 정신이 아홉 살 몸에 갇힌 채로, 일주일 후 늑대한테 뜯겨 죽는다. 이걸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웹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전개인데 내가 지금 그 웹소설 안에 들어와 있었다. 심지어 주인공도 아니고 엑스트라 역할로. 이거 완전 손해 보는 회차 아니냐. * 울고 싶었다. 근데 눈물보다 먼저 손이 움직였다. 서른두 해를 살아본 사람의 본능이란 게 그런 거다. 일단 살고 봐야지, 라는 생각이 슬픔보다 먼저 튀어나왔다. 회사에서 상사한테 갈굼당해도 일단 사직서보다 대안을 먼저 찾던 몸이었다. "그래서 대안이 뭔데요?"라는 질문에 답을 못해도, 일단 자리에서 버티는 게 습관이 된 몸이었다. 이번에도 똑같았다. "살 방법을 찾아야지." 입 밖으로 뱉고 나니 좀 웃겼다. 방금까지 죽는다고 절망하다가 바로 계획 세우는 이 전환 속도, 나 자신도 어이가 없었다. 이런 걸 보고 사회화가 잘 됐다고 하나, 아니면 그냥 현실 감각이 무뎌졌다고 하나. 일단 방을 둘러봤다. 침대 옆에는 작은 협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손바느질로 만든 것 같은 목각 인형이 놓여 있었다. 창문 밖으로는 넓은 정원이 보였고, 저 멀리 담장 너머로 산등성이가 흐릿하게 이어져 있었다. 저게 흑랑산인가. 거리로 보면 걸어서 두어 시간, 마차로는 한 시간쯤 걸릴 법한 곳이었다. 게임 지도로 대충 계산해봐도 비슷한 거리였다. 여기서 아무리 방구석에 숨어봐도, 결국 그 산까지 끌려가는 이벤트가 강제로 발생할 거라는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 원작 지식을 최대한 끌어와 봤다. 흑랑산 습격 이벤트는 정확히는 '숲 시찰' 도중 발생한다. 무진결이 아버지를 따라 영지 순찰을 나갔다가 무리에서 이탈, 늑대 떼에게 포위된다. 이유는 단순했다. 원작에서는 그냥 '어린 도련님이 겁 없이 나섰다가'라는 한 줄 설명이 전부였다. 디테일 없는 죽음이었다. 스토리 작가가 아마 마감에 쫓겨서 대충 써넣은 거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니까 뒤집어 말하면, 그 시찰에 안 나가면 되는 거였다. "그럼 그냥 방에 콕 박혀 있으면 되는 거 아냐?" 너무 쉬운데? 아프다고 꾀병 부리고, 방문 걸어 잠그고, 하녀들한테 죽을병 걸린 척 연기까지 하면 완벽하지 않을까. 서른둘 인생 짬바로 연기 한번 제대로 보여주면 되는 거였다. [이벤트는 반드시 발생합니다] 뭐야, 이건 또 뭔데. 갑자기 뜬 시스템 문구를 보자마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마치 게임 안에서 "이 퀘스트는 스킵할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창이 뜨는 느낌이었는데, 그게 지금 내 인생을 두고 뜨고 있었다. 이 세계, 사람 봐가면서 이벤트를 강제로 발생시키는 거였어? 와, 게임 만들 때 밸런스 조정 안 하냐, 진짜. 유저 피드백 게시판에 "강제 이벤트 좀 없애주세요" 도배해도 안 고쳐지는 그런 게임, 딱 이런 느낌이었다. 혼자 방구석에서 던전마스터한테 컴플레인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객센터 있으면 전화라도 걸고 싶었다. * 결국 답은 하나였다. 피할 수 없다면, 그날 살아남을 실력을 만들어야 했다. 일주일. 168시간. 아홉 살짜리 몸으로 검술을 배워서 늑대 무리를 뚫고 살아남는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마치 신입사원 연수 딱 일주일 받고 바로 실전 투입되는 느낌이랄까. 그것도 실전이 늑대 무리라는 게 문제지만. "좋아. 벼락치기다." 대학 때 시험 전날 밤새워 공부하던 감각을 되살렸다. 그때도 절박함이 실력을 만들었다. 족보도 없이 강의 노트 하나로 A+ 받아내던 그 근성, 지금 여기서도 통할 거라고 믿어야 했다. 지금도 그럴 거라고 믿기로 했다. 안 믿으면 답이 없으니까. * 일단 몸 상태를 체크했다. 체력은 뭐, 딱 아홉 살 애 몸이었다. 달리기 5분 만에 헉헉대고, 검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목검 하나 드는 데도 손목이 후들거렸다. 팔뚝에 힘을 줘봤다. 근육이라고 할 만한 게 아예 안 잡혔다. 서른둘 강도윤이 헬스장 3개월 등록해놓고 두 번 가고 만 그 흑역사조차, 지금 이 몸에는 없었다. "...이거 진짜 죽는 거 아니냐." 순간 다시 절망이 밀려왔지만, 곧바로 접었다. 지금 울어봤자 늑대가 봐주는 것도 아니고. 늑대한테 "저 사실 서른두 살 직장인 영혼이 들어있는데 한 번만 봐주세요" 해봤자 씹힐 게 뻔했다. 밖으로 나가 저택 뒤뜰을 찾았다. 나무 사이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공기는 서늘했고, 흙냄새와 이슬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 이런 감각을 아홉 살 몸으로 느끼니 뭔가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아직 다들 자는 시간이었다. 좋아, 아무도 안 보는 데서 몰래 훈련하자. 혹시라도 '아홉 살 도련님이 갑자기 새벽에 검 휘두른다'는 소문이 돌면 그것도 골치 아플 테니까. 저택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고 이것저것 캐물으면, 그 뒤처리가 더 귀찮아질 게 뻔했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전혀 몰랐다. 뒤뜰 구석, 낡은 나무 목검을 손에 쥐었다. 창고 한켠에 방치되어 있던 걸 발견한 거였는데,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는 걸 대충 옷깃으로 훔쳐냈다. 무게는 가벼웠지만 손아귀가 이미 저릿했다. "후우."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일주일. 살아남기 위한 벼락치기의 시작이었다. 목검을 두 손으로 쥐고 자세를 잡아봤다. 유튜브에서 본 검술 영상 몇 개, 게임 속 캐릭터 동작 몇 개를 어설프게 조합해 흉내 내봤지만,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휘청, 균형이 무너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 혼자 중얼거리고는 다시 일어섰다. 새벽 공기 속에서 몇 번이고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팔이 저리고 다리가 후들거려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그 순간, 저택 복도 창문 너머로 그림자 하나가 스윽 움직였다는 걸,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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