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구걸하던 내가 낙원의 주인이라니

5화

나는 그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눈을 떴다. 배급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 성에서 밀가루와 소금을 나눠주는 그날만큼은 잿빛골 사람들 모두가 새벽부터 움직였다. 늦게 가면 줄 뒤쪽에 서게 되고, 줄 뒤쪽에 서면 배급이 부족해지기 십상이었다. 나는 부엌 한 켠에 놓인 낡은 자루를 꺼내 들었다. 밀가루 두 줌, 소금 한 줌. 그게 우리 두 사람이 한 달을 버티는 양이었다. "할아버지, 일어나셨어요?" 내가 방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벌써 일어나 있었다." 박현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방을 나섰다. 그의 걸음은 두 달 전보다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왼쪽 다리를 끌었다. 나는 그의 팔을 붙잡고 문밖으로 나섰다. 바깥은 아직 푸르스름한 새벽빛이었다. 잿빛골의 좁은 골목마다 사람들이 하나둘 나와 광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낡은 옷을 걸친 노인들, 아이를 등에 업은 여자들, 지친 얼굴의 남자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오늘은 사람이 많으니 나서지 않는 게 좋겠구나." 박현 할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팔을 꼭 붙잡았다. '괜히 눈에 띄면 안 돼.'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냥 배급만 받고 조용히 돌아가야 해.'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람들이 절반 이상 모여 있었다. 나는 박현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광장 끝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서는 앞쪽 상황이 한눈에 보였지만, 사람들 시선에서는 비교적 벗어난 자리였다. 광장 중앙에는 나무 상자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상자 하나에는 밀가루 포대가, 다른 하나에는 소금 자루가 쌓여 있었다. 그 옆으로 관리 셋이 서서 배급을 감독하고 있었다. 한 명은 배급 명단을 든 중년 남자였고, 다른 한 명은 저울을 조작하는 젊은 여자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붉은 망토를 두른 젊은 남자였다. 그의 허리에는 검이 매달려 있었는데, 손잡이가 예사롭지 않은 은빛으로 빛났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광택이었다. '저 문양.' 나는 그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검의 손잡이 끝에 새겨진 문양이 눈에 익었다. 동그란 원 안에 별 모양이 박힌 형태였다. 그날 골목에서 박현 할아버지를 쫓던 자들의 검에도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문양을 잊을 수가 없었다. 박현 할아버지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그 밤, 나를 스쳐 지나간 칼날 위에 똑같은 새 문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내가 작게 그를 불렀다. 박현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저 사람, 저 검..."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손끝으로 붉은 망토의 남자를 가리켰다. 박현 할아버지는 그쪽을 잠시 바라보다가,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가문의 문장이다."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도망친 그 가문의." 나는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두 달 동안 애써 잊으려 했던 그 밤이, 순식간에 다시 떠올랐다.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 박현 할아버지의 신음, 골목 벽에 튄 핏자국. '그 사람들이 여기까지 온 거야?' '설마, 배급을 감독하러 온 게 아니라...' 그 순간, 붉은 망토의 남자가 군중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광장 이쪽저쪽을 천천히 옮겨 다녔다. 나는 얼른 박현 할아버지의 팔을 잡아끌며 자리를 옮기려 했다. "할아버지, 저쪽으로 가요." 내가 속삭였다. 박현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저 거지애." 다희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다희는 광장 한쪽에서 배급을 지켜보러 나온 참이었다. 그녀는 비단으로 지은 겉옷을 입고, 하녀 한 명을 옆에 세워두고 있었다. 며칠 전 시장에서 하녀를 시켜 나를 매질하게 했던 그 여자아이였다. "쟤 아까 시장에서 봤던 애야." 다희가 옆의 하녀에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광장 소음 속에서도 또렷하게 들릴 만큼 컸다. "근데 옆에 있는 노인은 누구지?" 다희가 손가락으로 박현 할아버지를 가리켰다. 나는 그 손가락이 무섭도록 정확하게 우리 쪽을 향하고 있는 걸 봤다. 붉은 망토의 남자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이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그 시선이 박현 할아버지의 얼굴 위에서 멈추는 걸 봤다. 남자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의심에서 확신으로. "...찾았다." 남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가 광장의 소음을 뚫고 내 귓속에 박혔다. 박현 할아버지의 손이 내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의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은서야."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나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끼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빛에는 두 달 전 그 골목에서 봤던 것과 같은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광장을 채운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붉은 망토의 남자가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이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옆으로 물러섰다. 마치 길이 저절로 열리는 것 같았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도망쳐야 해.' '그런데 어디로.' 박현 할아버지의 입술이 떨리며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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