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구걸하던 내가 낙원의 주인이라니

4화

그날 이후로 나는 박현 할아버지의 은신처를 더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걸 도왔다. 원래 있던 곳은 잿빛골 어귀의 다 쓰러진 폐가였는데, 순찰대가 하루가 다르게 그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나는 밤마다 담벼락 뒤에 숨어서 순찰대의 발소리를 세곤 했다. 하나, 둘, 셋. 발소리가 멀어지면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박현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볼 때마다 미안한 얼굴을 했다. "나 때문에 너까지 위험해지는구나."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할아버지가 걸리면... 저도 어차피 끝이에요." 내가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나는 박현 할아버지를 숨겨주다 걸리면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좋은 결과는 아닐 거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차라리 같이 걸리는 게 마음은 편할지도.'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짐을 옮겼다. 잿빛골 외곽, 무너진 방앗간 지하에 오래된 창고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곳을 임시 거처로 삼았다. 방앗간은 지붕의 절반이 무너져 내려 하늘이 그대로 보였고, 벽은 온통 검은 곰팡이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열두 칸이었는데, 세 번째 칸이 부서져 있어서 뛰어넘어야 했다. 그곳에는 곰팡이 냄새가 진하게 났지만, 적어도 비바람은 막을 수 있었다. 나는 낡은 담요 두 장과 깨진 접시 몇 개, 초 세 자루를 챙겨갔다. 초는 하나에 이틀씩 쓸 수 있었으니, 아껴 쓰면 엿새는 버틸 수 있는 셈이었다. '그다음은 어떻게 하지.'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담담한 척했다. 어느 날 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검은 그림자 하나를 봤다. 창고 구석, 곰팡이가 가장 심하게 핀 자리였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금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발이 담요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괜찮다, 은서야." 박현 할아버지가 나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잡았는데, 그 손아귀에서 이상하게도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오자, 그것이 검은 고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털에서는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몸집은 여느 고양이보다 조금 커 보였고, 걸을 때 발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다. "이 아이가 그 아이인가." 고양이가 말했다. 나는 입을 벌린 채 그대로 서 있었다. 내 귀가 잘못된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고양이가, 말을 했다. "묵이라 한다." 검은 고양이가 나를 보며 말했다. "박현의 오랜 벗이다." 나는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말하는 고양이라니.' '세상에 이런 게 다 있구나.' 박현 할아버지는 그제야 조금 웃으며 말했다. "묵이는 정령이다." 그가 말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는 존재지." 나는 그 말이 조금 서글프게 들렸다. 세상에 믿을 존재가 고양이 하나뿐이라는 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뜻일까. 나는 묵이의 눈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도... 믿어주실 수 있나요?" 내가 물었다. 묵이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 노란 눈동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는 것 같았다. "그건 네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겠지." 묵이가 말했다. 그 대답이 서운하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안도감도 들었다. 적어도 무조건 거절당한 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날부터 묵이에게 조금씩 말을 걸었다. "묵이는 몇 살이에요?" 내가 물었다. 묵이는 대답하지 않고 눈만 감았다 떴다. "밥은 뭘 먹어요?" 내가 다시 물었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박현 할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묵이는 필요한 대답만 한다." 그가 말했다. "그러니 서운해하지 마라." 나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웃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저녁, 박현 할아버지는 낡은 담요 위에 나를 앉히고 물었다. 창고 안에는 초 하나가 힘겹게 타고 있었고, 그 불빛이 벽에 우리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은서야, 너는 부모님이 어떻게 됐는지 아느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이 떨렸다. 손끝이 저절로 담요 자락을 움켜쥐었다. "...엄마가, 저를 시장 골목에 두고 갔어요." 내가 겨우 말했다. "저한테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러고는 안 왔어요." 박현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 손은 마르고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그때가... 다섯 살 때였어요." 내가 말을 이었다. "저는 아직도 가끔 생각해요, 엄마가 왜 돌아오지 않았는지." "돈이 없어서 그랬을 거예요, 저를 먹일 돈이 없어서."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를 썼다. '울면 안 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박현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가 말했다. "버려진 아이는 죄인이 아니야." 나는 그 말에 눈물이 핑 도는 걸 느꼈지만, 애써 참았다. 눈을 몇 번 깜박이며 초의 불빛을 바라봤다. "할아버지." 내가 불렀다. "저는... 나중에 커서, 저 같은 아이들을 돕고 싶어요." "배고픈 사람한테 밥 주고, 아픈 사람한테 약 주고." "그러면 저도 조금은 자유로워질 것 같아요." 박현 할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놀라움과 어떤 슬픔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 마음, 잊지 말아라." 그가 조용히 말했다. "세상은 그 마음을 쉽게 짓밟으려 들 것이다." "그래도... 잊지 말아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묵이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금빛 눈동자가 유난히 오래 창고 밖, 부서진 계단 쪽을 향해 있다는 걸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박현 할아버지가 잠든 뒤에도 묵이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나는 그 밤, 묵이가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그것이 위협을 향한 경계음이었는지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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