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구걸하던 내가 낙원의 주인이라니

2화

지팡이 끝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찰싹! 지팡이가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릇이 손에서 빠져나가, 동전 두 개가 흙바닥을 굴렀다. 무릎이 먼저 땅에 닿았고, 그다음 손바닥이 닿았다. 작은 돌부리에 손바닥이 긁혀 화끈거렸다. "다시는 이 근처에 얼씬거리지 마!" 하녀가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시장 안에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누구도 나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다희는 그 옆에서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색 저고리에 자수가 놓인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그 옷감만으로도 은자 한 냥은 족히 나갈 것 같았다. 머리에는 은비녀를 꽂고 있었고, 발에는 흙 한 점 묻지 않은 하얀 버선을 신고 있었다. 표정에는 조금의 미안함도 없었다. 오히려 재밌다는 듯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저것 좀 봐. 냄새나는 거지가 감히 우리 가게 앞을 지나가려 하잖아." 다희가 하녀에게 말했다. "아가씨 말씀이 맞아요. 요즘 저런 것들이 부쩍 늘었지요." 하녀가 맞장구를 쳤다. '저 애는 진짜 나를 몰라보는구나.' 나는 흙바닥에 엎드린 채로 그렇게 생각했다. 육 년이면 얼굴이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저 애의 눈에는 원래 거지의 얼굴 따위가 남지 않는 걸까. 네 살 때 우리는 같은 골목에서 자랐다. 다희의 어머니가 내게 떡을 나눠주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때는 다희도 나를 친구라고 불렀었다. 그 기억이 지금 이 순간과 겹쳐지자, 속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왔다. 나는 그 감정을 애써 삼켰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화를 내봐야 얻을 것은 매질뿐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굴러간 동전 두 개를 손으로 더듬어 주워 담았다. 한 개는 발밑에, 다른 한 개는 포목점 문턱 가까이에 떨어져 있었다. 손바닥에 작은 상처가 나서 피가 조금 배어 나왔다. 동전을 주우려고 손을 뻗을 때마다 어깨가 시큰거렸다. 다희와 하녀는 이미 포목점 안으로 들어가버린 뒤였다. 문 안쪽에서 다희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가 등 뒤에 오래도록 박혀 있었다. 나는 그릇을 끌어안고 시장 뒷골목으로 걸었다. 걸음마다 어깨가 욱신거렸다. 그릇에는 원래도 얼마 없던 곡식 몇 알마저 다 쏟아져 버려서,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괜찮아, 원래 이런 날이 있는 거야.'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일은 다른 골목으로 가면 돼.' 시장 상인들의 눈초리도 이제는 익숙했다. 누구는 혀를 차고, 누구는 그냥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 시선들 사이를 지나 골목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골목 끝에는 무너진 담벼락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그 그늘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담벼락의 돌 틈에는 작은 이끼가 자라 있었고, 그 습기 찬 냄새가 코끝에 스쳤다. 나는 상처 난 손바닥을 옷자락으로 꾹 눌렀다. 피가 옷에 옅게 배어 나왔다. 그때 문득, 여섯 달 전 그날이 떠올랐다. 여섯 달 전, 초겨울. 그날도 나는 지금처럼 빈 그릇을 안고 걷고 있었다. 바람이 매섭게 불어서 손끝이 얼어붙을 것 같았던 밤이었다. 골목 끝에서 한 노인이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한 것이 그날이었다. 노인의 옷은 낡았지만 천의 결이 남달랐고, 손목에는 이상한 문양이 새겨진 팔찌가 있었다. 옷자락 끝에는 은실로 놓은 자수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는데, 오래 입어 색이 다 바랬어도 그 정교함만은 여전했다. '죽은 건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노인의 가슴이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잠시 그 팔찌를 훔쳐볼까 생각했다. '저거 팔면 빵을 며칠은 먹을 수 있을 텐데.' 그런 계산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쳤다. '못해도 엿새는 굶지 않고 버틸 수 있겠지.' 하지만 노인의 마른 손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 손은 뼈마디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고, 손톱 밑에는 흙이 까맣게 끼어 있었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손이었다. "할아버지." 내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노인은 눈을 겨우 뜨고 나를 봤다. "...물."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릇에 남아 있던 물 반 컵을 그의 입가에 대주었다. 노인은 그것을 조금씩 삼키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숨소리가 조금씩이나마 안정되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날 밤, 그를 버려두고 갈 수가 없어서 옆에 앉아 밤을 지켰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의 얇은 옷깃이 흔들렸고, 나는 내가 걸치고 있던 낡은 겉옷을 벗어 그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다음 날 아침, 노인은 눈을 뜨고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는 왜 도망가지 않았느냐." 그가 물었다. "...무서워서요." 내가 대답했다. "혼자 있는 게 더 무서웠어요." 노인은 그 말에 잠시 침묵하다가, 마른 입술을 움직여 웃었다. 그 웃음이 낡은 얼굴에 잔주름을 만들어냈다. "이름이 뭐냐." 그가 물었다. "은서예요." 내가 대답했다. "나는 박현이라 한다." 노인이 말했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그 골목으로 갔다. 아침이면 물 한 그릇을 챙겨 그에게 가져다주었고, 저녁이면 남은 밥 몇 술을 나눠 먹었다. 박현 할아버지는 처음엔 말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이야기를 들려줬다. 젊은 시절 먼 곳을 떠돌았다는 이야기, 산속에서 몇 해를 살았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는 여전히 말하지 않았다. 내가 물으면 그는 늘 웃기만 할 뿐, 답을 피했다.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그가 살아 있고, 매일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린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만 어느 날, 그가 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달이 밝은 밤이었고, 골목 안은 조용했다. "이건 아무에게도 보여주면 안 된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바닥 위에서 작은 불꽃이 스스로 피어올랐다가 사그라졌다. 불꽃은 손끝을 태우지 않고 그저 손바닥 위에 둥그렇게 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숨을 멈춘 채 그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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