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전장의 죽음 징크스

4화

"전 병력 후퇴! 광역 마법 준비!" 분대장의 외침이 협곡을 갈랐다.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다들 정신없이 뒤로 물러나는 와중에도, 나는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후방에서 서은하가 지팡이를 들었다. 큰 검은 모자 아래로, 벗겨진 로브가 바람에 날렸다. 짙은 화장을 한 얼굴에는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냉소가 걸려 있었다. 저 표정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변한 적이 없었다. "뭘 그렇게 놀란 눈으로 봐. 이제부터가 진짜니까." 그녀가 지팡이 끝을 협곡 중심으로 겨눴다. 지팡이 끝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파앗, 파앗. 마력이 응축되는 소리였다. 장무결과 간부의 격돌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두 존재가 부딪힐 때마다 대지가 갈라지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콰앙. 또 한 번. 콰앙. 세 번째 격돌에서 협곡 벽면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흙먼지가 치솟았다. 그 안에서 장무결의 대검이 번쩍였다. 붉은 검광이 간부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피는 튀지 않았다. 저 괴물한테 피가 있기는 한 건지도 의심스러웠다. "저 안에 우리 애들이 있는데요!" 박지훈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갈라져 있었다. "알아." 서은하는 짧게 대답했다.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 안 쓰면 전멸이야." 박지훈이 뭐라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반박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아서였을 거다. 윤성민이 내 팔을 잡았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도훈아, 여기서 나가야 해."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격돌을 보면서도, 머릿속 어딘가는 계속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안에 있는 사람들, 아직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그런 것들. "장무결 씨가 아직 저 안에 있잖아." 내가 겨우 말했다. "나와야 돼. 여기 있으면 너도 휩쓸려." 윤성민의 목소리에는 조급함이 묵직하게 배어 있었다. 언제나 저런 목소리였다. 남 걱정하는 게 습관인 사람처럼. 간부가 장무결의 대검을 튕겨내며 거리를 벌렸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장무결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서은하가 주문을 완성했다. 지팡이 끝에서 빛이 폭발적으로 응집되기 시작했다.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물러나!" 그녀의 외침이 늦었다. 협곡 전체가 하얗게 물들었다. 콰아아앙! 광역 마법이 터졌다. 열기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강타했고,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쉴 수 없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졌다. 소리도 사라졌다. 오직 열기와 압력만이 존재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순간 대검을 놓치고, 뭔가에 밀려 협곡 바닥으로 굴렀다. 등이 바위에 부딪혔다. 통증은 나중에 느껴졌다. 뜨거운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온 건 내가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였다. "윤성민!"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른 건 그 뒤였다. 그는 여전히 내가 있던 자리에 서 있었다. 나를 밀어낸 자세로, 그대로. 두 팔을 앞으로 뻗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지키려는 자세였다. 하얀 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순식간이었다. "...영웅이 될 거라 그랬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들은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말이 웃으면서 한 말이었는지, 원망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목소리는 이미 빛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신발 한 짝도, 옷깃 하나도, 아무것도. 협곡이 조용해졌다. 전투의 소음도, 사람들의 외침도 순간적으로 멈췄다. 멀리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그냥 내 귀에서 울리는 이명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그 빈자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잡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손이 먼저 움직였다. 서은하가 지팡이를 내리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이 나를 향했다. "운이 없었네." 그 말이 너무 가벼워서, 나는 순간 화가 났는지 슬픈지 구분할 수 없었다. 속에서 뭔가가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목구멍이 좁아지고, 손끝이 저렸다. "저 사람 살릴 수 있었잖아요." "아니, 없었어." 서은하가 딱 잘라 말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였다. "저기 있던 애들 절반이 죽었어. 저 마법 안 썼으면 우리 다 죽었고." 맞는 말이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됐다. 그런데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해와 받아들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방금까지 나랑 얘기하고 있었어요."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어제도, 오늘도, 계속 옆에 있었는데." "그래서 더 이상하다는 거야." 그녀가 나를 가만히 보다가, 뜻밖의 말을 던졌다. "장무결 곁에 있던 사람이었지, 방금 죽은 애." "무슨 소리예요." "몰라서 물어? 걔, 아까 대병사가 널 감쌀 때 옆에 있었잖아."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방금 사람이 죽었는데, 이 여자는 무슨 퍼즐을 맞추듯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장무결 근처에 있던 애들, 유난히 많이 죽어. 우연이라고 하기엔 좀 이상하지." 김하늬가 어젯밤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저 사람한테 호의 받은 사람은 다 죽었대.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던 말이었다. 소문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근거 없이 부풀려지고, 사람들 입을 타고 다니면서 살이 붙는 법이니까. 그런데 지금, 이 협곡 바닥에서, 방금 사라진 사람을 앞에 두고 듣는 그 말은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우연이겠죠." 내가 말했다. 목소리에 확신이 없었다. "그렇겠지." 서은하가 웃으며 돌아섰다. 향수 냄새가 짙게 남았다.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화사한 냄새였다. "신경 쓰이면 대병사 근처엔 얼씬도 마. 그게 제일 안전해."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로브 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그녀가 진심으로 저 말을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나를 흔들어보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협곡 저편에서 간부가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완전히 물러난 건 아니었다. 뭔가를 기다리는 듯한 걸음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느리게, 마치 시간이 자기편이라는 걸 아는 것처럼. 그 걸음걸이가 유난히 신경에 걸렸다. 밀린 게 아니라, 물러나기로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장무결이 대검을 어깨에 걸치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발소리마다 흙먼지가 일었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의 몸에 난 상처들이 눈에 들어왔다. 팔뚝, 어깨, 옆구리. 얕지 않은 상처였는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걸어왔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분명한 감정이 스쳤다. 분노인지, 자책인지. "괜찮나." 그가 물었다. 짧은 한 마디였다. 그 안에 뭐가 담겨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걱정인지, 형식적인 물음인지, 아니면 방금 죽은 사람에 대한 대답 없는 사과인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윤성민이 서 있던 빈자리를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바람이 그 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나는 계속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가 서 있던 흔적, 그가 남긴 온기, 그런 것들을. 장무결 근처에 있던 애들, 유난히 많이 죽어. 서은하의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방금까지 내 옆에 있었던 사람의 마지막 웃음이 계속 겹쳐졌다. 영웅이 될 거라 그랬는데. 그 말이 자꾸 되풀이됐다. 마치 아직 그가 어딘가에서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간부는 완전히 물러나지 않은 채, 협곡 저편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나를 보는 게 아니었다. 장무결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 속에 담긴 것이 두려움이 아니라는 걸, 나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를, 확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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