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낡은 종이 냄새가 코끝에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제하는 서고 깊숙한 곳, 먼지 쌓인 서가들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방금 훔쳐본 명부를 다시 펼쳤었다.
그 순간까지는 조용했다.
발소리는 두 명이었다.
이제하는 서가 뒤에 붙은 채 숨을 죽였다.
마법석의 빛을 완전히 꺼두었다.
손에 쥔 두루마리도 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분명히 여기로 들어갔소.
낮은 목소리였다.
확실합니까.
또 다른 목소리가 뒤따랐다.
둘 다 처음 듣는 자들이었다.
왕비 쪽 세력이라는 걸 직감했다.
원작에는 없는 인물들이었지만, 이 궁 안에서 왕비파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방계 왕자를 견제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
그게 곧 이유였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서가와 서가 사이, 좁은 통로를 따라 규칙적으로 울리는 발소리였다.
이제하는 등을 서가에 바짝 붙였다.
심장 소리가 발소리보다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왕자를 처리하라는 명이었소.
오늘 밤 안으로.
이제하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처리라니.
농담이 아니었다.
방금 읽은 명부의 '감시 등급 최상'이라는 문구가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원작에 없던 설정이 곧바로 현실의 위협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죽는 건가.
원작 몇 화도 못 채우고?
둘 중 하나가 단검을 꺼냈다.
칼날이 마법석 불빛에 스치며 번쩍였다.
발소리가 서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멈췄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이제하는 곁눈질로 통로를 살폈다.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지 없는지, 지금 판단해야 했다.
이제하는 서가 위쪽 서적 하나를 손끝으로 슬쩍 밀었다.
쿵.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저쪽이오!
두 자객이 그 소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이제하는 반대편 통로로 몸을 날렸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원작 지식이 여기서 진짜 힘을 발휘했다.
이 서고의 구조, 원작에는 안 나왔지만 아까 훑어본 지도 덕분에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세 칸.
그다음 왼쪽 갈림길.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리며 몸을 움직였다.
서가 사이 좁은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등 뒤로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두 사람으로 갈라져 각자 쫓는 모양이었다.
왼쪽에서 하나, 오른쪽에서 하나.
포위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숨소리 죽이십시오.
갑자기 옆에서 손이 뻗어와 이제하의 입을 막았다.
놀라서 돌아보니 유건이었다.
갑주도 없이, 평상복 차림으로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다.
뭐 하는 겁니까 여기서.
왕자님을 미행했습니다.
유건이 짧게 답했다.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미행이라니 뻔뻔하게.
그보다 지금은 저 둘을 처리하는 게 우선입니다.
유건의 손이 검 자루를 쥐었다.
그 손동작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평상복 차림의 시종이라기엔 너무 매끄러웠다.
이건 또 뭐야.
저건 시종의 손이 아니었다.
이제하는 순간 판단을 내렸다.
원작 지식만으로는 이 상황을 못 넘긴다.
지금은 몸을 움직여야 했다.
의문은 나중에.
살고 나서 물어봐도 늦지 않다.
왼쪽 자객이 서가를 돌아 나타났다.
단검이 정확히 목을 향해 날아왔다.
이제하는 몸을 낮추며 서가 하나를 통째로 밀었다.
와르르.
무너지는 책들 사이로 자객이 균형을 잃었다.
발밑에 쌓인 책들이 미끄러지며 그대로 자객의 무릎을 꺾었다.
그 틈에 유건이 뛰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자객 하나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한 명 처리.
이제하는 속으로 숫자를 세며 다음을 노렸다.
남은 하나는 어디에.
다른 하나가 뒷걸음질 치다 이제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칼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자객의 눈빛이 차가웠다.
지금 이 자리에서 끝내야 한다는 눈빛이었다.
이제하는 반사적으로 손에 쥔 두루마리를 펼쳤다.
조금 전 읽어낸 문자 하나가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뜻은 몰랐지만 발음은 알고 있었다.
왜 알고 있는지는 몰랐다.
파직.
손끝에서 푸른 불꽃이 튀며 자객의 손목을 스쳤다.
자객이 비명을 지르며 단검을 놓쳤다.
불꽃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은 건 손끝에 남은 화끈한 감각뿐이었다.
유건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러 자객을 제압했다.
두 번째 자객도 바닥에 쓰러졌다.
정적이 흘렀다.
숨을 몰아쉬며 이제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방금 그건 뭐였지.
원작에도, 이 세계 어디에도 배운 적 없는 힘이었다.
오직 두루마리를 읽고 나서 튀어나온 반응이었다.
이런 게 가능하다고?
서고 두루마리 하나 읽었다고 마법이 나와?
손끝이 아직 저릿했다.
두루마리를 다시 품에 밀어 넣으며 이제하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왕자님.
유건이 검을 거두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이상했다.
놀람도 아니고, 존경도 아닌, 뭔가를 재는 듯한 눈빛이었다.
방금 그 마법,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냥 좀 배웠습니다.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하는 얼른 말을 돌릴 핑계를 찾았다.
그보다 당신은 정체가 뭡니까, 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이제하는 유건의 손목에 걸린 낡은 팔찌를 보았다.
왕비 궁 시녀들이 차는 것과 똑같은 문양이었다.
이건 또 뭐야.
방금까지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팔찌 하나가, 모든 걸 다시 의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하는 시선을 팔찌에서 유건의 얼굴로 옮겼다.
유건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 태연했다.
아니, 눈치챘으면서 모른 척하는 건지도 몰랐다.
바닥에 쓰러진 두 자객이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이제 저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문제였다.
그보다 더 급한 문제가 눈앞에 서 있었다.
당신, 대체 누구 편입니까.
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삼켜졌다.
지금 물어봐서 좋은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이제하는 대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유건의 손목에서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