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금서고는 원작에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던 장소였다.
이제하는 그 사실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원작 지식이 안 통하는 구간은 위험하지만, 동시에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곳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원작이 그려낸 세계는 언제나 정해진 무대 위에서만 돌아갔다.
왕궁 연회장, 기사단 연습장, 왕비의 처소.
그런 곳들은 이미 강도훈의 머릿속에 지도처럼 박혀 있었다.
하지만 서궁 지하는 아니었다.
그 어떤 장면에도, 어떤 대화에도 등장하지 않은 공백.
공백이라는 건 곧 기회였다.
서궁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좁고 차가웠다.
발밑에서 돌가루가 서걱거렸다.
횃불도 없이 손끝 마법석 하나로 길을 밝혔다.
원작에서 방계 왕자들도 배우는 하급 마법 정도는 이 몸에 남아 있었다.
전투에는 못 써도 이럴 때는 딱이었다.
계단은 끝이 없는 것처럼 이어졌다.
발소리를 죽이려 벽에 손을 짚었다가 이끼 낀 감촉에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런 데를 누가 관리를 해.
끼익.
녹슨 철문이 열렸다.
경첩이 갈리는 소리가 지하 통로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제하는 잠시 숨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안은 곰팡이와 오래된 종이 냄새로 가득했다.
서가가 벽을 따라 빙 둘러 있었다.
높이가 천장까지 닿아 있어서, 위쪽 칸은 손이 닿지 않을 것 같았다.
먼지 쌓인 책들 사이로 낡은 명부가 눈에 들어왔다.
표지가 다른 책들보다 유난히 두꺼웠다.
감시 대상 명부.
표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이제하는 별생각 없이 그 책을 펼쳤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며 넘어갔다.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페이지를 넘기던 손가락이 멈췄다.
방계 왕자 이제하. 감시 등급 최상.
뭐?
이제하의 얼굴이 굳었다.
눈이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훑었다.
글자가 바뀌길 바라는 것처럼.
원작에서 이 캐릭터는 그저 '무해한 방계 왕자'였다.
권력 다툼에 관심 없고, 궁 안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존재.
그게 원작이 그려낸 이제하였다.
등장 분량도 손에 꼽을 정도였고, 대사조차 몇 줄 없었다.
독자였던 강도훈조차 이 캐릭터의 이름을 처음엔 헷갈렸을 정도였다.
그런데 명부에는 정반대로 적혀 있었다.
최상위 감시 대상.
이유는 '왕비의 혈통 서열 위협'이라는 짧은 문구뿐이었다.
이거 뭔 소리야.
문장이 짧아서 더 불길했다.
설명이 붙어 있었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 것 같았다.
짧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고, 그건 이 세계 안에서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원작에서 안 나온 설정이 튀어나온 거였다.
소설 밖에서는 이 인물이 처음부터 위험인물로 분류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웹소설 속 서술은 겉껏이었고, 진짜 이야기는 그 아래 숨어 있었다.
작가가 독자에게 보여준 이제하와, 이 세계가 실제로 취급하는 이제하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강도훈이 알던 정보 중 얼마나 더 많은 부분이 겉껏이었을까.
그 생각에 뒷목이 서늘해졌다.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위험한 건 확실했다.
왕비 쪽에서 이미 자신을 감시 대상으로 못박아뒀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이건 원작에도 없던 정보였다.
원작을 읽은 사람 중 누구도 모르는 사실.
지금 이 순간 이 세계에서 이 정보를 손에 쥔 건 오직 이제하 하나뿐이었다.
위험한 만큼 값어치가 있는 정보다.
이제하는 명부를 다시 서가에 꽂았다.
좌절할 시간은 없었다.
대신 다른 서가로 눈을 돌렸다.
서가는 넓었다.
칸마다 분류가 다른 것 같았지만, 정확한 기준은 알 수 없었다.
낡은 계약서, 왕실 족보 사본,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이 그려진 지도.
오래된 두루마리 하나가 유난히 눈에 밟혔다.
다른 서가보다 안쪽 깊숙이, 손이 겨우 닿는 위치에 꽂혀 있었다.
표지에 낯선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문양은 뱀이 원을 그리며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하는 그걸 뽑아 들고 조심스레 펼쳤다.
펼쳐보니 문자가 이상했다.
대현국의 글자가 아니었다.
곡선이 유난히 많고, 획이 이어지는 방식이 낯설었다.
그런데 읽혔다.
분명 처음 보는 문자인데, 강도훈의 뇌 어딘가가 그 뜻을 알아채고 있었다.
글자를 하나씩 눈으로 훑을 때마다 뜻이 저절로 떠올랐다.
마치 예전에 배운 적 있는 언어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느낌이었다.
원작 소설 속에서 딱 한 번, 등장인물 하나가 이 문자를 해독하며 대충 설명하던 장면이 있었다.
작가가 각주처럼 던져놓은 세계관 설정이었다.
독자였던 강도훈은 그걸 그냥 지나가는 정보로만 읽었을 뿐이었다.
그때는 그저 세계관을 풍부하게 만들려는 장치라고 생각했다.
스토리에 큰 영향을 주는 부분도 아니었고, 다시 언급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기억이 지금, 실제로 통했다.
이거 완전 사기잖아.
이제하는 헛웃음이 나왔다.
독자로 읽었던 정보가 이렇게 직접적인 힘이 될 줄은 몰랐다.
게임처럼 스킬창이 뜨는 것도 아니고, 능력치가 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기억, 그것도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기억 한 조각이 실제 세계의 언어를 해독하는 열쇠가 되어 있었다.
두루마리에는 왕실 혈통을 봉인하는 결계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결계의 구조와, 그것을 유지하는 방식.
그리고 그 결계를 깨는 방법이 함께 적혀 있었다.
원작에는 없던 정보다.
그렇다는 건 이 지식은 이 세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무기라는 뜻이었다.
소설의 줄거리를 아는 것과, 소설이 미처 설명하지 않은 세계의 이면을 읽어내는 것.
둘은 전혀 다른 차원의 힘이었다.
전자는 남들이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는 정보였고, 후자는 오직 이제하만 쥘 수 있는 카드였다.
이제하는 두루마리를 눈으로 몇 번이나 더 훑었다.
결계의 약점, 봉인을 깨는 조건, 필요한 매개체까지.
머릿속에 새겨 넣듯 반복해서 읽었다.
이거 잘 써먹으면.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타박, 타박.
느리고 조심스러운 걸음이었다.
이제하는 재빨리 두루마리를 품에 숨기고 마법석 불빛을 낮췄다.
서가 그림자 뒤로 몸을 붙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이 장소를 아는 사람이 또 있다고?
누군가 철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