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85세 노인, 두 살배기 대공자

5화

강태호는 서재 문 앞에서 몰래 엿듣던 나를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다행히 두 살배기의 은신 스킬은 생각보다 뛰어났다. '몸이 작으니까 숨을 곳도 많더라.' 나는 그날 밤 침대에 누워 그 사실을 새삼 감사했다. 문틀 뒤에 딱 붙어서, 숨소리도 죽이고, 심지어 눈도 깜빡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 정도면 첩보 영화 주인공 해도 되겠는데.' 나는 속으로 스스로를 칭찬했다. 물론 그 첩보 영화 주인공이 두 살배기라는 게 함정이었지만. 다만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백준서의 보고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도련님께서는… 언행이나 반응 속도가,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성숙하십니다." 백준서가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아니 그게, 내가 원래 서른 몇 살 먹은 영혼이라서 그런 건데.' 나는 속으로 억울해했다. 하지만 그 억울함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억울하다고 소리 지르는 순간 진짜로 정체가 들통날 판이었으니까. 조현민도 거들었다. "검을 처음 보여드렸을 때 시선이, 두려움이 아니라 관찰이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건 그냥 검이 신기해서 그런 건데.' 나는 속으로 반박했다. 번쩍거리는 쇳덩이를 보고 눈이 반짝인 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아기들은 원래 반짝이는 거 좋아한다, 나도 그거 안다. 문제는 내가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 이유가 조금 다르다는 거였다. '저 검, 아마 마나 소드겠지. 각인 상태는 어떨까.'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쳐다본 거였으니까. 두 살배기 아기의 눈에 그런 계산이 담겨 있었으니, 저 사람들이 이상하게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딱히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반박하려는 순간 정체가 드러날 판이었으니까. 서재 안에서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어찌나 무거운지, 문 밖에 서 있는 내 심장까지 쿵쿵 울리는 것 같았다. "흠…" 강태호가 낮게 침음했다. 대공가의 가주라는 사람이 이렇게 신중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더 불안했다. '차라리 화를 내든가, 소리를 지르든가.'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상상은 나쁜 쪽으로만 뻗어갔다. 혹시 나를 어디 깊은 지하실에 가두고 실험이라도 하려는 건 아닐까. 혹은 이상한 마법사를 불러다가 정체를 캐묻는 의식이라도 벌이려는 건 아닐까. '…설마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이가 대인접촉을 부담스러워하지 않게, 은밀히 관찰하시오." 강태호가 명령했다. "두 분 모두, 이 일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그가 덧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 담긴 결의가 어찌나 확고한지,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 같았다. 문 밖에서 그 말을 듣던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나, 이제 24시간 관찰 대상이 된 건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거 완전 관찰 예능 아니냐. '대공가의 숨겨진 신동, 그의 모든 것을 밀착 취재합니다.' 뭐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면 딱 이 상황일 것 같았다. 물론 시청자는 없고, 출연료도 없고, 계약서에 사인한 적도 없었지만. '…이거 완전 무보수 관찰 예능이네.' 나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 다음 날부터 뭔가가 확실히 달라졌다. 백준서는 마법 수업 때마다 유난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런저런 질문을 흘렸다. "도련님, 오늘은 기분이 어떠세요?" 그가 물었다. 마법 교사가 그런 질문을 할 이유는 없었다. '…이거 완전 관찰용 질문이잖아.' 나는 속으로 딴지를 걸며 최대한 아기다운 대답을 만들어냈다. "으, 좋아!" 나는 대답했다. 최대한 어눌하게, 최대한 발음도 흐리게. 혀를 조금 짧게 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정도면 완벽한 아기 연기가 아닌가. 백준서는 그 대답을 듣고 뭔가를 수첩에 적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수첩은 없었지만, 표정만큼은 진짜 수첩에 적는 사람 같았다. "도련님, 오늘은 마나를 얼마나 느끼셨어요?" 그가 또 물었다. '이 사람 진짜 대놓고 물어보네.' 나는 속으로 어이없어했다. 두 살배기한테 마나를 얼마나 느꼈냐고 물어보는 마법 교사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으응… 몰라!" 나는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속으로는 이미 오늘 마나가 얼마나 부드럽게 몸을 타고 흘렀는지 다 계산이 끝난 상태였지만. 조현민도 검술 수업이라기보다는 놀이에 가까운 활동을 시키면서 나를 유심히 지켜봤다. 목검을 쥐어주고 휘둘러보라고 하는데, 정작 그의 시선은 내 표정과 반응 속도에 더 꽂혀 있었다. '다들 나를 실험체 보듯이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네.'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목검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면서도, 최대한 삐뚤빼뚤하게, 최대한 균형을 못 잡는 척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하면 또 의심할 텐데.' 나는 속으로 계산을 굴렸다. 이게 무슨 연기 오디션도 아니고, 매 순간이 시험 같았다. 조현민은 내가 넘어질 때마다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대신 그 넘어지는 각도와 속도를 관찰하는 눈빛이었다. '…저 사람, 진짜 검술 교관이 아니라 데이터 분석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소율만은 여전히 평소와 다름없이 나를 대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나를 품에 안고, 밥을 먹여주고, 자장가를 불러줬다. 그 자장가 가락이 어찌나 익숙한지, 마치 전생에서도 들었던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아, 이건 그냥 내가 감성이 풍부해진 거겠지.' 나는 속으로 정정했다. 그녀만은 아직 그 은밀한 지시에 포함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혹은, 이미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나를 대하는 태도만은 바꾸지 않기로 한 것일 수도 있었다. '…뭐가 됐든, 지금은 저 사람이 유일한 안전지대다.' 나는 그렇게 정리했다. 적어도 한소율의 품에 안겨 있을 때만큼은, 나는 그저 두 살배기 아기로 존재할 수 있었다. 그 시간이 하루 중 유일하게 마음 편한 순간이었다. * 그날 밤, 나는 방 안에 홀로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에는 대공가 특유의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좀 복잡해졌다. '저런 문양 하나 새기는 데도 돈이 얼마나 들었을까.'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잡생각을 흘렸다. 두 살배기 아기가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도 우스운 그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선택지가 두 개다.'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하나, 재능을 최대한 숨기고 그냥 평범한 대공가 자제로 조용히 산다. 둘, 재능을 있는 대로 드러내고 이 세계에서 뭔가 큰일을 벌인다—예를 들면, 저잣거리에서 봤던 그 부조리한 노예제 같은 것을. 둘 다 위험했다. 첫 번째는 내가 답답해서 못 견딜 것 같았고, 두 번째는 아직 몸도 못 가누는 상태로 뭘 시작하기엔 너무 일렀다. '생각해보면 지금은 걷는 것도 힘든 수준인데, 세계를 구하겠다는 게 좀 웃기지.' 나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 노예 시장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쇠사슬에 묶인 사람들, 무표정한 상인들, 그리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는 사람들의 눈빛. 그 풍경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뭘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일단은 조용히 지내자.' 나는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몸이 자라고, 힘을 기르고, 정보를 모으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 순간, 방 안의 촛불이 스스로 흔들렸다. 바람은 없었다. 창문도 닫혀 있었고, 문틈으로 바람이 들어올 구석도 없었다. 지난번처럼 내 마력 때문이 아니었다. '…어?' 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촛불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흥미롭게 지내고 있나 보네." 그 목소리가 말했다. 신이었다. 죽음 이후 딱 한 번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 그 목소리를 다시 듣는 순간, 그날의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이 자식이 또 왜.' 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번엔 뭘 또 던져주려고 온 걸까. 지난번에는 이 세계로 던져놓고 알아서 살라고 했으면서. '설마 뭔가 또 조건을 붙이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속으로 경계했다. 촛불이 다시 훅, 꺼졌다. 방 안은 완전한 어둠에 잠겼고, 그 어둠 속에서 그 목소리만이 낮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가 얼마나 여유롭던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번엔 또 뭘 말하려는 거냐.' 나는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며 그 다음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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