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죽고 나서 알았다.
신이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훨씬 급이 낮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흥미로우니까.' 그 한마디로 내 다음 생을 결정해버린 그 목소리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목소리에는 미안함도, 죄책감도, 하다못해 사무적인 딱딱함조차 없었다.
그냥 재밌어 보이는 장난감을 골라 든 애 같은 톤이었다.
'85년 산 노인네를 그렇게 가볍게 집어던져도 되는 거냐.' 나는 그 순간 항의라도 하고 싶었지만, 항의할 몸도 목소리도 없었다.
85년을 살고 침대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던 나는, 정확히 그 다음 순간 청명(淸明) 왕국이라는 이세계의, 강씨 대공가 막내아들 강도윤으로 다시 눈을 떴다.
두 살배기 몸으로.
'…이 자식이 진짜.' 나는 울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욕을 삼켰다.
전생의 기억은 통째로 지워졌다고 그 목소리는 말했지만, 신이라는 존재 특유의 뭔가—성의 없는 시스템 관리처럼—덕분에 나는 지금도 내가 한국에서 평생 판타지 소설과 게임에 파묻혀 살다 간 노인네였다는 것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삭제 담당 부서가 야근을 좀 게을리했다는 것이다.
'하필 지워진 게 세계관 지식 말고 다른 거였으면 좀 편했을 텐데.' 옆으로 새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가족 얼굴이라거나, 통장 비밀번호라거나, 뭐 그런 거.
그런 건 싹 다 날아갔는데, 이상하게 '마력 감지는 항상 튜토리얼 스킬'이라는 잡지식은 멀쩡히 남아 있었다.
이러니 진짜 옛날 애니의 어느 조연 캐릭터가 된 느낌이었다.
*
두 살배기 몸으로 산다는 건 생각보다 고역이었다.
걷는 것도 힘든데 정신은 85세니까, 몸과 머리 사이의 괴리가 매일매일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빨리 걸어보자.' 그렇게 마음을 먹어도 다리가 후들거려서 세 걸음에 넘어졌다.
쿠당탕!
한 번 넘어지면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몸이 작으니 무게중심도 이상해서, 넘어진 채로 데굴데굴 굴렀다.
'중학교 때 축구 하다가 헛발질한 것보다 더 못 봐줄 꼴이다.' 나는 바닥에 코를 박은 채 속으로 자체 심판을 봤다.
"도련님!" 시녀가 달려왔다.
이름은 한소율.
스물 초반쯤으로 보이는, 다정한 눈매를 가진 이 시녀는 내 전속으로 붙은 지 벌써 반년째였다.
"또 혼자 걸으려고 하셨죠." 그녀가 나를 안아 올리며 웃었다.
"흐, 흐응." 나는 아기 흉내를 냈다.
'속으로는 팔순 노인인데 겉으로는 응응거리고 있어야 하는 이 개그 상황을 누가 알아줄까.'
나는 그 사실이 억울해서, 한소율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돌려 딴청을 부렸다.
물론 그래 봤자 두 살배기가 어른스러운 척하는 걸로만 보였을 거다.
한소율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내 볼을 톡톡 두드렸다.
"도련님은 참, 어른스럽게 눈을 뜨실 때가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찌잉-!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들켰나?' 나는 최대한 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응애." 나는 방금 한 말을 부정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아기 울음소리를 냈다.
한소율이 다시 웃었다.
다행히 그녀는 그냥 웃어넘길 만큼만 눈치가 있었다.
'휴, 살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적으로 크게 내쉬었다.
말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입을 열면 나오는 건 여전히 옹알이 수준이었다.
'말하기 스킬 레벨이 너무 낮다.' 나는 그 사실이 진심으로 슬펐다.
전생 85년 치 대화 경력이 이 몸 안에서는 전혀 반영이 안 됐다.
*
대공가의 저택은 넓었다.
웬만한 관광지보다 넓다고 하면 대충 맞을 것 같았다.
복도마다 마법으로 유지되는 조명이 은은하게 켜져 있었고, 정원에는 마정석으로 움직이는 분수가 돌아갔다.
'이게 바로 그거구나.'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전생에 그렇게 읽어대던 이세계 판타지 소설 속 그 세계관이, 지금 내 눈앞에 실제로 펼쳐져 있었다.
마법.
마정석.
귀족과 가문.
그리고—
한소율이 나를 유모차 비슷한 것에 태우고 정원을 산책시켜줄 때마다, 나는 그 광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저게 그 흔한 정령석 분수인가.' '저 문양은 대공가 상징인가 보네.' 속으로 하나씩 이름표를 붙이는 재미가 있었다.
전생에 그렇게 파고들었던 지식이 이렇게 실생활에 쓰일 줄은 몰랐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뾰족한 귀를 가진 하녀 한 명이 보였다.
짐을 두 배는 무겁게 짊어지고 있었고, 목에는 낡은 목걸이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저건… 노예 문양인가.' 나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
멀리서 봐도 목걸이 표면에 뭔가 마법 문자 같은 게 새겨져 있는 게 보였다.
'설마 저게 진짜 그거야.' 나는 소설 속에서만 보던 설정을 실물로 마주한 기분이 이상하게 서늘했다.
한소율이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 저건 아인족 노예예요. 이번에 새로 들어온." 그녀가 말했다.
마치 오늘 날씨 얘기하듯이.
'…그렇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게 여기서는 그냥 일상이라는 거지.' 나는 그 말투의 무게 없음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전생에 읽었던 소설들 중에도 이런 설정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페이지를 넘겼는데, 지금은 넘길 페이지가 없었다.
이 세계, 겉으로는 예쁜 판타지 배경화면처럼 보이는 이 세계 안쪽에, 뭔가 단단히 썩은 게 들어 있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직감했다.
'이거 완전 겉바속촉인데 속이 잘못 촉된 케이스잖아.' 나는 속으로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애써 마음을 눌렀다.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몸도 아니었으니까.
*
밤이 되면 나는 몰래 마법을 만져보려고 애썼다.
정확히는, 침대에 눕혀진 채로 손끝에 뭔가 신경을 집중해보는 정도였다.
'게임에서는 항상 마력 감지가 제일 기본이었는데.' 나는 전생의 경험을 총동원했다.
판타지 소설 700편, 게임 500시간, 애니메이션은 셀 수도 없었다.
지식만 따지면 나는 이 세계의 어느 마법사보다도 마법에 대해 '아는' 게 많았다.
실기는 전혀 없었지만.
첫날 밤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역시 이론만 빠삭한 놈은 실전에서 이 모양이지.' 나는 자조하며 눈을 감았다.
둘째 날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손끝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다가 말다가, 결국 흐지부지 잠들어버렸다.
'대학 시험 전날 벼락치기하다가 조는 느낌이랑 똑같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손끝에 뭔가 미미한 진동이 느껴진 건 그로부터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바람은 없었다.
'…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다시 집중했다.
이번에는 확실했다.
손끝에서 뭔가 실이 뻗어 나가는 감각이 있었다.
촛불이 더 크게 흔들렸다.
화르륵!
순간 촛대 전체가 확 타올랐다.
"으악!"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방문이 벌컥 열렸다.
"도련님?!" 한소율이 뛰어들어왔다.
그녀가 손을 휘젓자 불이 순식간에 꺼졌다.
방 안에 매운 냄새만 남았다.
'와, 저 사람도 마법사였구나.' 나는 그 순간에도 감탄이 먼저 나왔다.
'그냥 시녀가 아니라 시녀 겸 소방관이었던 거야.' 위기 상황에도 딴생각이 먼저 튀어나오는 건 여전했다.
한소율이 나를 안고 한참을 살피더니,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그녀는 촛대를 한 번 보고, 나를 한 번 보고, 다시 촛대를 봤다.
그 눈빛이 슬슬 수상하다는 쪽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도련님… 방금 그 촛불, 도련님이 그러신 거예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이거 어떡하지.' 나는 최선을 다해 눈을 굴렸다.
시치미 뗄 만한 표정이 뭐였더라, 하고 전생의 연기 경험까지 뒤져봤지만 딱히 쓸 만한 게 없었다.
"응…?" 나는 대답을 흐렸다.
한소율은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제가 가주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직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두 살배기 몸으로, 인생 두 번째 취업 면접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첫 취업 면접도 떨렸는데, 이번엔 심지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상태로 평가받는 거잖아.' 등골이 서늘했다.
가주님이라는 사람이 어떤 성격일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볼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거 잘못하면 두 살에 인생 두 번째 낙제인가.' 나는 진심으로 걱정이 됐다.
다음 날, 저택 전체에 소문이 돌았다.
대공가의 막내아들이 마법 수업을 조기에 받게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복도를 지나가는 하녀들이 나를 힐끔거리는 눈빛이 어제와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호기심 반, 경계심 반 같은 그 시선을 받으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조용한 아기 생활도 이제 끝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