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자, 오늘은 기본 자세부터 다시 봅시다."
백강호가 목검을 던져줬다. 나는 받아서 딱 원작 지식대로, 어정쩡하게 자세를 잡았다. 원작 선우진의 검술 실력은 재능은 있으되 노력을 안 해서 애매한 수준이었다. 그 애매함을 재현하는 게 오늘 목표였다.
발끝을 살짝 안쪽으로 모으고, 어깨는 일부러 힘을 뺐다. 검을 쥔 손목 각도도 정석보다 5도쯤 어긋나게. 이 정도면 딱 "재능은 있는데 게을러서 폼이 개판인 애" 느낌이 나올 것 같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완벽한 연기였다.
"자세 좋습니다. 그럼 가볍게 대련 한 번 해볼까요."
대련이라니. 예상 밖의 전개였다. 원작 지식에는 이 시점에 대련 이벤트가 없었는데.
아니, 잠깐. 원작 지식이 완벽하다고 누가 그랬나. 나는 원작을 다섯 번쯤 정독한 열성 독자였을 뿐이지, 작가 본인이 아니었다. 세세한 디테일까지 다 기억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근데 하필 이 타이밍에 그 디테일이 튀어나온다고?
"어, 저...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살짝만 해봅시다."
백강호가 목검을 들고 다가왔다. 그 눈빛이 어제 응접실에서 봤던 것과 똑같았다. 뭔가를 확인하려는 눈빛. 이 노인네, 어제부터 계속 저 눈으로 나를 스캔하고 있었다. 무슨 CT 촬영이라도 하는 건가.
촤악!
첫 공격이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시험이었다. 나를 떠보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속도였다.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피했다.
아니, 그냥 피한 게 아니라 완벽하게 피했다. 발끝의 무게중심 이동, 손목의 각도, 다음 공격을 예측한 스텝. 삼십 대 정신머리가 아니라 여덟 살 몸이 스스로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아 망했다.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삐뽀삐뽀. 이거 완전 무면허 운전자가 갑자기 F1 서킷에서 코너링 하는 수준의 부조화였다. 몸은 왜 이렇게 잘 움직이는 건데. 설마 여덟 살 몸에 원작 최종 빌런의 신체 밸런스가 이미 세팅되어 있었던 건가.
"...!"
백강호의 눈이 커졌다. 나도 순간 얼음이 됐다. 이거, 방금 그거, 애매한 척하기로 한 계획에서 백만 광년쯤 벗어난 움직임이었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나는 일부러 다음 순간 발을 헛디디는 척하며 뒤로 넘어졌다.
쿵!
"어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균형을 잘 못 잡아서..."
엉덩이를 문지르며 최대한 어리숙하게 웃었다. 근데 백강호의 표정을 보니 이미 늦었다는 게 느껴졌다.
"...도련님."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방금 그 회피, 균형을 못 잡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닙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노인네, 눈이 아주 매섭구나.
"저는 그냥... 운이 좋았던 것 같은데요."
"운이라고 하기엔, 발의 각도가 정확히 제 다음 공격 궤적을 예측한 각도였습니다."
젠장. 완전 봤네.
백강호가 목검을 늘어뜨리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오십 년 검을 잡은 사람의 눈빛이란 게 이렇게 무섭구나, 라는 걸 처음 실감했다. 마치 백화점 반품 코너 직원이 영수증 없는 손님을 볼 때 같은 눈빛이었다. "이거 어디서 산 건지 다 아는데 왜 거짓말을 하세요?" 하는 느낌.
"도련님. 최근 저택에 이상한 일이 많습니다. 벽이 사라졌다는 소문도 있고, 마법부 심판관이 방문하기도 했고, 오늘은 이런 움직임을 보이시고. 저는 이게 다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호세아 8:7,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둔다]
바람 좀 심었더니 벌써 광풍이 몰려오는 이 속도, 진짜 사람 미치겠다. 씨앗 심은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열매가 주렁주렁이다. 무슨 급성장 비료라도 뿌린 건지.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도망칠 곳도 없고, 거짓말을 더 쌓아 올릴 재간도 없었다. 이럴 때는 정면 승부밖에 없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시나리오를 빠르게 돌려봤다. 첫째, 계속 시치미 떼기. 근데 이건 이미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둘째, 울면서 도망치기. 여덟 살 몸이니 가능하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셋째, 어느 정도 인정하고 협상하기. 이게 제일 그나마 손해가 적어 보였다.
"백강호 단장님."
나는 목검을 내려놓고 그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제가... 사실 조금 특이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근데 저는 그 재능이 부담스럽습니다."
이건 절반은 진심이었다. 정말로 부담스러웠다. 재능이라는 게 좋은 것도 아니고, 이 세계관에서 재능은 곧 주목이었고, 주목은 곧 원작 스토리에 편입되는 지름길이었다. 나는 그냥 조용히 시골에서 감자나 캐고 싶은 사람인데.
"제가 만약 그 재능을 함부로 드러내면, 사람들이 저를 경계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일부러 감추려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단장님을 속이려 한 건 아닙니다."
백강호가 잠시 침묵했다. 그의 표정에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의심, 혼란, 그리고 뭔가 다른 것.
침묵이 길어질수록 내 심장은 마치 배달 앱에서 "라이더가 배정되었습니다" 알림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초 단위로 쫄렸다. 이 침묵이 길어지면 안 되는데. 이 노인네가 뭔 결론을 내리든 나는 반박할 카드가 없었다.
"...도련님."
"네."
"제가 지금까지 모신 도련님들 중에, 재능을 부담스러워한 분은 처음입니다."
그가 목검을 다시 들었다.
"좋습니다. 오늘 본 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대신, 정식으로 저와 검술 수련을 하십시오. 숨기지 마시고."
뭐?
"그, 그게..."
"만약 도련님이 정말로 위험한 재능을 지녔다면, 오히려 제가 옆에서 지켜보는 게 안전할 겁니다. 숨기려다 오히려 사고가 커지는 걸 저는 몇 번 봤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근데 이게 오늘 위기를 넘긴 건지, 새로운 감시자를 하나 더 얻은 건지 헷갈렸다. 마치 세입자가 집주인한테 하자보수 좀 봐달라고 했더니 집주인이 매일 방문 점검을 오겠다고 하는 상황이었다. 도움인지 감시인지 구분이 안 됐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일단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표했다. 백강호의 표정이 그제서야 살짝 풀렸다. 이 노인네 의외로 마음이 여렸나,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 눈빛 속 의심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뭔가 숨기고 있다는 확신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첫 번째 파도는 넘겼다. 근데 이 저택에 파도가 하나만 있을 리가 없다는 걸, 나는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다.
*
그날 밤, 나은이 저녁 식사를 가져오면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도련님, 요즘 저택 분위기가 조금 이상합니다."
식판을 내려놓는 손이 평소보다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나은은 원래 조용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눈치를 보는 기색이 짙었다.
"이상하다고요?"
"단장님이랑 그, 심판관님이 자주 눈을 마주치고 뭔가 이야기를 나누시더라고요."
뭐? 벌써 둘이 이야기를 나눴다고?
숟가락을 들다가 그대로 멈췄다. 백강호랑 그 심판관이 벌써 접선을 했다니. 이거 완전 두 부서가 협업해서 나 하나 감시하는 태스크포스라도 꾸린 건가. 국세청이랑 검찰이 손잡고 세무조사 나온 느낌이었다.
"단장님이 심판관님한테 뭐라고 하셨는지는 모르겠는데, 표정이 되게 심각하셨어요. 그리고 심판관님도 고개를 끄덕이시고..."
나은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저택 사람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돌아요. 도련님한테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긴 것 같다고."
등줄기가 다시 서늘해졌다. 이 저택, 파멸 확정 악역의 은신처로 쓰기엔 너무 감시 인력이 빨리 늘고 있었다. 은신처는 원래 조용하고 눈에 안 띄어야 하는 법인데, 여기는 오히려 스포트라이트가 자꾸 늘어나는 구조였다. 무슨 신인 아이돌 데뷔 무대도 아니고.
"...그런가요."
나는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다음 위기가 이미 시작됐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숟가락으로 국을 뜨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은이 그걸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도련님, 식사 다 하시면 부르세요. 저는 밖에 있을게요."
나은이 조용히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나는 혼자 남아 식판을 내려다봤다. 밥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백강호와 심판관이 이미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면, 다음 스텝은 뭘까. 단순한 관찰인가, 아니면 정식으로 뭔가를 확인하려는 절차인가.
그리고 그 위기는, 며칠 뒤 열릴 정식 검정 자리에서 터질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