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파멸 확정인데 성실이라니

1화

눈을 떴을 때 나는 여덟 살이었다. 정확히는, 여덟 살짜리 몸에 삼십 대 한국인 영혼이 들어앉아 있었다. 그럴 리가. 설마. 뭐지, 이 손가락은 왜 이렇게 작아. 마디마디가 앙증맞은 게 무슨 소시지 비엔나도 아니고, 이걸로 어떻게 스마트폰을 쥐고 살았더라—아니, 여기 스마트폰이 없잖아. 그것부터가 문제였다. 천장을 한참 올려다봤다. 캐노피 침대. 실크 시트. 창밖으로는 성벽 같은 게 보였다. 아, 이거 완전히 그거잖아. 거울 앞에 서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은발에 가까운 금발, 보석처럼 새파란 눈, 이목구비는 이미 완성형이라 시비 걸 데가 없었다. 마치 누가 3D 모델링 프로그램으로 "미형 캐릭터 최대치"를 찍어놓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문제는 얼굴이 아니라 뇌 속에 들어있는 정보였다. [천명기(天命記)]. 내가 전생에 무려 삼백 시간 넘게 갈아 마신 그 미친 난이도의 서양풍 육성 게임. 스팀 평점은 좋았는데 도전 업적 클리어율은 3퍼센트대였던, 그 지옥 같은 밸런스의 게임. 나는 그 게임을 왜 그렇게까지 팠던 걸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인생에 도움이 될 리 없는 취미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삼백 시간이 내 목숨줄이 되어 있었다. 그 안에서 이 얼굴, 이 이름, 이 위치의 캐릭터는 딱 하나의 역할만 맡고 있었다. 파멸 확정 서브빌런, 선우진. 어느 루트를 타든, 성기사 엔딩이든 마법사 엔딩이든 심지어 숨겨진 배드엔딩이든 상관없이, 이 자식은 열 살이 되는 해에 죽는다. 정확히는 스승이 될 뻔한 검술단장의 손에, 아니면 마법부의 손에, 어떨 땐 자기 아버지 손에도 죽는다. 죽는 방식만 열 몇 가지고 사는 방식은 없다. 위키에도 이런 문구가 박혀 있었다. '선우진: 사망 확정 캐릭터. 루트 불문 10세 사망. 회피 불가 이벤트.' 회피 불가라니, 게임 회사 놈들 참 인정머리 없게 태그를 달아놨다 싶었는데, 그게 지금 내 목에 걸린 시한부 선고문이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에스겔 37:3,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능히 살아야지 그럼. 안 그러면 내가 지금 이 짓을 왜 하고 있는데. 여기서 죽으면 나는 두 번 죽는 거다. 삼십 대 때 한 번, 그리고 여덟 살에 또 한 번. 그건 좀 억울하잖아. 인생 두 번 사는데 둘 다 명 짧게 살면 그게 무슨 리셋이야, 그냥 재수 없는 인간이지. 나는 거울 속 꼬맹이 얼굴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이 웃음이 원작에서는 '오만하고 재수 없는 도련님의 대표 표정'이라고 위키에 박제되어 있었다는 걸 떠올리자 곧바로 표정을 지웠다. 안 돼, 저건 죽는 표정이야. 나는 거울을 향해 다시 한 번, 이번엔 최대한 순박하고 어리숙한 표정을 지어봤다. 뭐지, 이게 더 무섭게 나오는데. 연습이 필요하다. 아침마다 표정 연습을 해야 할 판이었다. "진 도련님, 기침하셨습니까." 문 밖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은. 내 전담 메이드다. 원작에서는 대사 세 줄짜리 엑스트라였는데, 지금은 나에게 하루 열두 시간 붙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름을 아는 사람이 이 저택에서 나 하나일 거라는 사실이, 뭔가 마음을 무겁게 했다. "들어오세요, 나은 씨."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은이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열일고여덟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였다. 세숫물 대야를 든 손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 그게 나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안다. 원작 게임 대사집에 그런 대목이 있었다. '선우진은 하인의 이름을 외우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하인을 그냥 가구쯤으로 취급하는 대목도 있었다. 배경 소품 1, 배경 소품 2. 그런 취급을 받다가 결국 배신에 가담하는 하인 엔딩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 나는 매일 아침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이게 내 전략이다. 별거 없다. 이름 하나 불러주는 게 뭐 대단한 투자냐 싶겠지만, 이 바닥에서 인심은 이렇게 사소한 데서 쌓이는 법이다. 배달앱 리뷰에 별점 다섯 개 받는 것도 결국 포장 하나 더 챙겨주는 데서 갈리는 것처럼. "세숫물 받아 왔습니다." "고마워요." 나은의 눈이 순간 커졌다. 매번 이 반응이다. 여덟 살짜리 도련님이 하인에게 존댓말을 쓰고 고맙다는 말을 한다는 게, 이 세계 기준으로는 상당히 이상한 일이라는 뜻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겸손하고 성실해야 한다. 그래야 안 죽는다. "...예, 도련님." 나은이 얼른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저 반응, 저게 벌써 몇 달째인데도 익숙해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뭐, 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여덟 살 몸으로 서른 대 넘은 아저씨의 정신머리를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가끔은 그냥 애답게 바닥을 뒹굴며 떼를 쓰고 싶은 충동도 들었다. 근데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서 위키 문서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선우진: 성질 급함, 감정 기복 심함, 하인들에게 물건을 던진 전적 있음.' 안 돼. 참아야 한다. 나는 지금 인생 이력서를 새로 쓰는 중이다. 오늘도 검술 수련이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반드시 열 살 이전에 만들어야 할 이미지 하나를 쌓아 올려야 했다. '겸손하고 성실한 도련님'. 원작에서 이 자식이 죽은 이유는 명확했다. 재능은 넘쳐나는데 그걸 게을리하고, 오만하게 남을 무시하고, 결국 검술단장을 배신자로 몰아 죽이려다 역으로 당했다. 그러니까 답은 나와 있었다. 재능을 숨기고, 겸손하게, 누구도 적으로 만들지 않으면 된다. 말은 쉽지. 세숫물에 얼굴을 씻으며 나는 오늘의 할 일을 되짚었다. 첫째, 검을 잡을 때 너무 잘하지 말 것. 둘째, 검술단장에게 웃으면서 인사할 것. 셋째, 절대로 재능을 티 내지 말 것. 마치 회사 면접 전 자기소개서를 외우는 기분이었다. 죽지 않기 위한 자기소개서라니, 이력서 항목 중에 '생존 여부'가 들어가는 건 살아보면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문제는 내 몸의 재능이 진짜 사기라는 거였다. 어제 검을 처음 쥐어봤는데 검술단장이 눈을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놀랐다. 삼십 대 아저씨 정신에 여덟 살 게임 최강 빌런 신체가 합쳐지니까 이게 뭔 사기캐가 나온 거지. 검을 쥐는 순간 손목이 저절로 각도를 잡았다. 마치 몸이 이미 다 알고 있고, 정신머리만 겉에서 관광하는 기분이었다. [시편 139:14, 내가 오묘하게 지음을 받았음이라] 오묘한 게 아니라 밸런스 붕괴다, 이 자식아. 개발자들 밸런스 패치 좀 하지, 이 정도면 초기 캐릭터 스펙 표부터 잘못됐다고 봐야 한다. 연무장으로 가는 복도를 걸으며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검술 수련에서는 절대 튀지 말자. 딱 적당히, 재능 없는 척, 열심히 하는 척. 그게 오늘의 목표였다. 복도를 지나며 마주치는 하인들에게도 눈을 마주치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들 흠칫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하다. 원작 대사집에서 선우진은 하인과 눈을 마주치는 법이 없었으니까. 연무장 앞에 도착했을 때, 검술단장이 이미 나와 있었다.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그 자세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어제 내 검을 보고 눈을 의심하던 그 표정이 아직도 얼굴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 이거 벌써 불안한데. 오늘은 정말 최대한 어설프게 굴어야 한다. 검을 놓치는 척도 한번 해볼까. 아니, 그건 너무 오버인가. 연무장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아직 몰랐다. 오늘 아침 목표 리스트에 하나가 더 추가될 거라는 걸. 검술 수련 말고, 마법 수련까지도. "진 도련님, 오늘부터 기초 마법 수업도 병행하시랍니다. 공작님의 지시입니다." 집사가 건조하게 전한 그 한 문장에,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마치 겨우겨우 하나 막고 있던 방화벽에 새 취약점이 뚫린 기분이었다. 검술도 숨겨야 하는데 마법까지? 관리해야 할 스탯이 하나 더 생겼다는 소리 아닌가. 인생 이력서에 항목이 자꾸 늘어나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다. 마법. 원작에서 이 자식의 고유마법 이름이 뭐였는지,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허공>. 그리고 그게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마법이 개화하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는 것도, 그 국면의 끝이 결국 이 몸의 파멸로 이어진다는 것도. 집사는 내 표정이 굳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다음 일정을 읊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반쯤 흘려들으며 머릿속으로 위키 페이지의 그 항목을 다시 떠올렸다. 고유마법 <허공>: 발현 조건 불명, 발현 시점 불명, 다만 발현 이후 캐릭터의 사망 확률이 100퍼센트로 고정됨. 100퍼센트라니. 이건 뭐 확률 표기라기보다는 사망 선고서에 붙은 도장 같은 거였다. 나는 연무장 문지방에 선 채로, 오늘 하루가 갑자기 두 배로 길어진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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