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역인데 제자가 여신급이라니

5화

울음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낮게, 그리고 길게. 짐승의 울음이라기보다는 무언가 갈리는 소리 같았다. 나는 화로의 불을 줄이고 창가로 다가갔다. 발밑에서 나무 바닥이 삐걱거렸다. 그 작은 소리에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두막 밖, 나무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엔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건가 싶었다. 아니었다. 그림자는 규칙적으로, 무언가를 찾는 듯한 리듬으로 움직였다. 늑대라고 하기엔 어깨 높이가 사람 키를 넘었다. 저 정도 크기라면 문틀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고는 들어올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기억을 뒤져봤다. 심연숲 완충 지대에 서식하는 개체 목록, 그중 이 정도 크기에 해당하는 건 딱 하나였다. 혈랑왕(血狼王). 중심부 서식 개체가 완충 지대까지 내려오는 건 원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식지 이론에 따르면 혈랑왕은 최소 사흘 거리는 떨어진 심연숲 중심부에 있어야 했다. 무언가가 그놈을 이쪽으로 밀어낸 게 아니라면, 자기 발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는 뜻이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됐다. 최악이다. 나는 서아를 깨웠다. "일어나세요. 지금 당장." 목소리를 낮췄지만 단호하게 냈다. 서아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몇 초간 상황 파악이 안 된 얼굴로 나를 보다가, 창밖의 그림자를 보고는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저게… 뭐야." "혈랑왕입니다. 여기서 만날 개체가 아닙니다." "그럼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야?" "오두막 밖으로 나가는 순간 끝입니다. 저 정도 크기면 도보 속도로는 절대 못 벗어납니다. 이 안에서 버텨야 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오두막의 벽이 그 발톱을 얼마나 버틸지 자신이 없었다. 이 흙벽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야은 비바람이나 겨우 막는 수준이었다. 상급 개체의 발톱 한 번이면 종이짝처럼 뜯길 벽이었다. 나는 며칠 전 무너진 제단 아래에서 발견해 챙겨두었지만 아직 다룰 수 없는 신화급 검 옆의 재료 상자를 뒤졌다. 손이 급해서 상자 안 물건들이 서로 부딪혀 달그락거렸다. 늑대를 쫓는 향료 주머니가 눈에 들어왔지만, 그건 하급 개체용이었다. 상급 개체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향료 냄새를 맡고 오히려 흥미를 보일 수도 있었다. 창밖의 그림자가 오두막 벽에 몸을 부딪쳤다. 쿵. 벽이 흔들렸다. 흙벽 틈에서 먼지가 쏟아졌다. 천장에 매달아둔 마른 약초 다발이 흔들리며 바스락 소리를 냈다. "아저씨, 저거 계속 저러면…" "압니다." 나는 대답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상자 바닥에서 등불용 결정을 꺼냈다. 어제 겨우 완성한,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결정이었다. 여기에 은빛 이끼를 섞으면 강한 빛을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서아가 저번에 만졌던 그 이끼였다. 나는 급하게 화로에 재료를 넣었다. 결정과 이끼를 섞어 뭔가를 만들려 했다. 하지만 조합이 되지 않았다. 재료끼리 반응은 하는데, 뭔가 촉매가 빠진 느낌이었다. 화로 안에서 재료가 미미하게 빛을 내다가 다시 죽었다. 서아의 손이 필요했다. 이유는 모른다. 다만 저번에 이끼가 서아의 손에서만 반응했던 걸 기억했다. "손 여기 대세요." 서아는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재료가 빛을 냈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밝기였다. 화로 안이 순식간에 하얗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 빛나는 결정을 재빨리 형태를 잡아 작은 구슬 모양으로 응고시켰다. 손끝이 뜨거웠다. 참을 만했다. "이게 뭔데?" "섬광탄입니다. 시야를 마비시킬 겁니다. 그 틈에 도망쳐야 합니다." 벽이 다시 흔들렸다. 이번엔 벽 틈이 갈라졌다. 갈라진 틈으로 밤바람이 들어왔다. 그 바람에 실려 짐승의 숨소리가 들렸다. 거칠고, 습하고, 낮았다. 서아가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나 저거 상대할 수 있어." "무슨 소립니까." 나는 구슬을 쥔 손을 멈추고 서아를 봤다. 얼굴에 장난기는 없었다. "저번에 이끼 만졌을 때, 뭔가 느껴졌어. 몸에서 뭔가 도는 느낌. 지금 저 결정 만졌을 때도 똑같았어. 그거 다시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그걸 실험할 때가 아닙니다." "다른 방법 있어? 저 벽 무너지면 우리 둘 다 죽어." 서아의 목소리가 흔들렸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눈빛이 문제였다. 흔들리는 목소리보다 흔들리지 않는 눈이 더 무서웠다.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반박할 말은 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지금은 만용을 부릴 때가 아니라고. 하지만 벽이 또 흔들렸고, 시간이 없었다. "저 재료 남은 거 나한테 발라줘. 그리고 저 놈이 문 부수고 들어오면, 내가 붙잡고 있을게. 아저씨는 그 틈에 저거 던져서 시야 마비시키고 나가." "당신이 죽습니다." "안 죽어. 왠지 안 죽을 것 같아." 무책임한 말이었다. 근거도 없었다. 저런 말을 하는 열여섯 살짜리를 믿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서아의 눈에서 다른 걸 봤다. 마을이 통째로 사라진 그날, 자기만 도망쳤다는 죄책감. 이번엔 도망치지 않겠다는 각오. 그 각오가 진짜인지 아닌지 판단할 시간조차 없었다. 벽이 세 번째로 흔들렸다. 나무 조각이 튀었다. 하나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뜨겁고 날카로운 통증이 뒤늦게 따라왔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알겠습니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게 옳은 판단인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벽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뭐라도 해야 했다. 나는 준비해둔 물약을 서아의 팔과 목에 발랐다. 임시로 만든 신체 강화 연고였다. 원래는 채집 중 급하게 이동할 때 쓰려고 만들어둔 것이었다. 완전한 효과는 아니었다. 잠깐이라도 순발력을 올려줄 수는 있었다. 그거면 됐다. 잠깐이라도 벌면 된다. "신호를 주면 즉시 물러나세요. 약속입니다." "알았어." 대답이 너무 쉽게 나왔다. 지켜질 약속인지는 알 수 없었다. 벽이 완전히 부서졌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흙벽 한쪽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흙먼지가 방 안 가득 퍼졌다. 그 먼지 사이로 혈랑왕의 앞다리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형광처럼 빛났다. 크기가 예상보다 컸다. 실제로 마주하니 게임 화면으로 본 것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감이었다. 숨소리 하나에도 방 안 공기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서아가 앞으로 뛰어나갔다. 나는 그 순간, 원칙이라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단어인지 깨달았다. 관여하지 않는다는 다짐은 이미 오래전에 깨졌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아이를 살리는 것뿐이었다. 상인의 원칙, 채집가의 원칙, 다 필요 없었다. 혈랑왕의 앞발이 서아를 향해 내려왔다. 서아가 몸을 굴려 피했다.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어깨가 발톱에 긁혔다. 피가 튀었다. 붉은 자국이 흙바닥에 점점이 떨어졌다. 하지만 서아는 쓰러지지 않았다. 일어난 서아의 눈이 순간, 아주 짧게 은빛으로 물들었다. 정말 짧았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봤다. 그건 연고의 효과가 아니었다. 연고는 그런 색을 내지 않는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섬광탄을 던졌다. 번쩍— 오두막 안이 하얗게 물들었다. 눈이 시릴 정도의 빛이었다. 혈랑왕이 고통스러운 울음을 터뜨리며 뒷걸음쳤다. 거대한 몸이 무너진 벽 틈으로 다시 물러났다. 나는 서아의 팔을 잡아채 밖으로 끌어냈다.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넘어질 새도 없었다. 둘 다 살았다. 일단은. 숲속을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방향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그냥 오두막에서 먼 쪽으로, 나무가 많은 쪽으로 뛰었다. 나뭇가지에 팔이 긁히고, 발밑에 걸리는 뿌리에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뒤에서 쫓는 소리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서야 나는 걸음을 멈췄다. 서아는 어깨를 붙잡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깨에서 흐른 피가 손가락 사이로 배어나왔다. "괜찮습니까." "…어. 근데 아저씨." "네." "방금 그거, 나 진짜로 뭔가 느꼈어. 눈이 이상하게 뜨거웠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아의 어깨 상처를 살폈다. 상처 부위를 조심스럽게 눌러보고, 소매를 걷어 확인했다. 다행히 깊지 않았다. 지혈만 잘 하면 큰 문제는 없을 상처였다. 가방에서 지혈용 연고를 꺼내 상처에 발랐다. 서아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프냐고 묻지는 않았다. 물어도 대답이 뭘지 뻔했다. 붕대를 감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방금 본 은빛.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열여섯 살 소녀가 마력 없는 몸으로 태어났다가, 위기의 순간에 그런 빛을 낸다는 건, 이 세계의 규칙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다. 마력이 없는 인간은 그 어떤 조건에서도 빛을 내지 않는다. 그게 이 세계의 기본 법칙이었다. 그 법칙이 지금, 눈앞에서 깨졌다. "이끼를 만졌을 때도, 결정을 만졌을 때도, 지금도. 세 번 다 같은 반응이었습니까?" "어. 비슷했어. 뭔가 뜨거운 게 팔에서부터 눈까지 올라오는 느낌." "통증은 없었습니까?" "조금. 근데 아플 만해서 아픈 건지, 원래 그런 건지 모르겠어." 붕대를 다 감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건 내가 아는 범위 밖의 일이었다. 게임 지식에도, 채집가 매뉴얼에도 이런 사례는 없었다. 마력 없이 태어난 인간이 특정 재료와 접촉했을 때 빛을 내는 현상.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각성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각성이 왜 하필 서아에게, 왜 하필 지금 일어났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괜찮다. 지금은 살았으니까. 하지만 오두막은 무너졌고, 혈랑왕은 이 근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상급 개체는 한 번 놓친 사냥감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서아의 몸에서 본 그 은빛은, 앞으로 이 아이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 훨씬 더 크다는 걸 예고하고 있었다. 당장 눈앞의 문제만 해도 산더미였다. 잘 곳도 없고, 재료도 태반이 오두막에 남아있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걸어서 가려면 최소 반나절. 그 사이에 혈랑왕과 다시 마주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숲 저편에서, 다시 낮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아가 붕대 감은 어깨를 문지르며 그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봤다. 얼굴에 남아있던 긴장이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저거… 우리 쫓아온 거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오늘 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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