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역인데 제자가 여신급이라니

1화

저택 뒷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쿵쿵. 둔탁한 소리였다. 사람 손이 아니라 창대로 두드리는 소리. 나는 짐 가방의 끈을 조이던 손을 멈췄다. 셋. 아니 넷. 발소리로 헤아려보니 그 정도였다. 방 안에 켜둔 촛불 하나가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괜찮다. 예상했던 일이다. 백작가의 셋째 아들이라는 껍데기는 오늘로 끝이다. 마력 한 방울도 못 타고난 자식을 후계 다툼에 남겨둘 이유가 없다는 걸, 큰형은 이미 오래전에 결정한 모양이었다. 사냥개들을 보낸 걸 보면 확실하다. 집사가 직접 나섰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인 몇 명 시켜서 될 일이었으면 이렇게까지 조용히 움직이지 않았을 테니까. 스무 해 전, 나는 이 몸에서 눈을 떴다. 열다섯 살이었고, 머릿속에는 이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기억들이 가득 차 있었다. 몬스터의 출현 위치, 던전의 함정 배치, 그리고 이 세계 전체가 하나의 게임이었다는 사실. 나는 그 게임을 플레이해본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그 게임 속에서 폭풍백작 이도현이라는 조연 악역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는지도 알고 있었다. 협곡의 시험. 용사 파티가 첫 대형 던전을 클리어하는 과정에서 지나가듯 처치하는 중간보스. 그게 나였다. 게임을 할 때는 그냥 스킵하고 넘어가는 컷신이었다. 용사가 검을 한 번 휘두르면 화면 가득 붉은 글씨로 CRITICAL이 뜨고, 폭풍백작은 대사 한 줄 남기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나는 그 장면을 최소 세 번은 봤다. 매크로 돌리듯 스킵하면서. 그때는 몰랐지, 내가 그 재가 될 캐릭터라는 걸.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죽는 시점을 알았으니 피할 수도 있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단 한 가지만 생각하며 살았다. 눈에 띄지 않는다. 강해지려 하지 않는다. 존재감을 지운다. 마력이 없다는 건 이 세계에서 저주에 가까웠지만, 나는 그걸 방패로 썼다. 재능 없는 자식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형들이 마력 수련장에서 검을 맞대는 동안 나는 뒷마당 창고에서 화로를 지켰다. 대신 나는 손으로 할 수 있는 걸 팠다. 연금술. 아이템 제작. 게임 속에서 봤던 조합식과 재료 위치를 몸으로 재현하는 일이었다. 포션 하나를 제대로 만들기까지 몇 번을 태웠는지 모른다. 재료 비율이 조금만 틀려도 화로가 검은 연기를 뿜었고, 그럴 때마다 하인들은 셋째 공자가 또 이상한 짓을 한다며 수군거렸다. 상관없었다. 수군거림은 관심이 아니었으니까. 관심 없는 자식은 죽이려 들지도 않는다. 그게 내 계산이었다. 스무 해 동안 그렇게 버텼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빨랐다. 협곡의 시험까지는 아직 몇 해가 남았어야 했는데, 큰형이 나를 먼저 치우려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최근 영지 재정이 기울었고, 마력 없는 자식에게 들어가는 식비와 인건비가 아깝다는 계산이 나온 모양이었다. 지난달 집사가 내 방 창고의 재료 목록을 슬쩍 살펴보고 갔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값이 얼마나 나가는지 재보러 온 거였다. 사람은 게임 속 시나리오보다 돈 문제로 먼저 죽는다. 이것도 어이없지만 사실이었다. "이도현 공자님, 안에 계십니까." 집사의 목소리였다. 예의를 갖춘 말투였지만, 그 뒤에 선 사냥개들의 숨소리는 예의와 거리가 멀었다. 씩씩거리는 숨소리, 갑옷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 침을 뱉는 소리까지 들렸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문을 열고 이미 준비해둔 밧줄을 걸었다. 문고리가 덜컹거렸다. 잠긴 문을 확인하는 소리였다. 곧 부술 거다. 3년을 준비했는데 여기서 몇 분 차이로 잡히면 그건 정말 억울한 죽음이다. 짐은 단출했다. 제작 노트 세 권, 응축시킨 재료 상자, 낡은 화로 하나. 이걸 다 챙기는데 3년이 걸렸다. 언제 도망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만 가볍게, 언제 죽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만 무겁게. 노트는 겉장이 다 헤졌다. 재료 상자는 방수 처리를 세 번이나 덧입혔다. 화로는 낡았지만 이건 버릴 수 없었다. 이게 없으면 나는 그냥 마력도 없고 검도 못 쓰는 얼치기일 뿐이니까. 창밖은 어두웠고 바람이 찼다. 나는 발을 내렸다. 쿵. 뜰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렸다. 등에 짊어진 화로가 허리를 때렸다. 아팠지만 신음은 삼켰다. 하지만 사냥개들은 이미 방문 앞에 몰려 있었으니 상관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정원 담을 향해 뛰었다. 등 뒤에서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콰직. 됐다. 늦었어도 상관없다. 저 방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으니까. 침대 위에 이불로 대충 사람 모양을 만들어놨으니 몇 초는 벌 수 있을 거다. 몇 초면 충분하다. 나는 담을 넘을 만큼의 다리 힘은 있는 사람이니까. 담을 넘고, 마을 외곽 마차 정류장까지 이십 분을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옆구리가 결렸다. 스무 해 동안 검 한 번 안 잡아본 몸이 이렇게 뛰어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다행히 삯마차 마부는 뒷돈에 약한 사람이었다. 나는 은화 몇 개를 쥐여주고 말했다. "동쪽으로 가주십시오. 심연숲 어귀까지." 마부의 표정이 굳었다. "거긴 사람이 안 사는 데유. 몬스터 밀도가 왕국에서 제일 높다고 소문난 데 아뉴. 밤중에 그짝으로 가다 마부까지 잡혀 먹는다는 소리도 있는디." "알고 있습니다." 마부는 더 묻지 않았다. 돈만 받으면 되는 사람이었다. 은화를 세는 손이 유난히 빨랐다. 나는 그게 고마웠다. 캐묻는 사람보다 돈만 세는 사람이 지금은 훨씬 나았다. 마차에 올라타는 순간, 저택 쪽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비상종이었다. 늦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늦었다는 게 나한테는 늦은 게 아니었다. 나는 이미 마차 안에 있었으니까. 나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봤다. 뒤쫓아 오는 불빛은 없었다. 아직은. 마차 바퀴가 자갈길을 밟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덜컹, 덜컹. 그 소리에 맞춰 심장도 뛰었다. 나는 재료 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으로 감쌌다. 이게 없으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심연숲을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게임 속에서 그 숲은 저레벨 플레이어가 절대 들어가지 않는 구역이었다. 몬스터가 많다는 뜻은,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사람이 없다는 뜻은, 나를 찾아올 사람도 없다는 뜻이었다. 게임에서 그 숲의 필드 몬스터는 최소 레벨 40 이상을 권장했다. 나는 지금 사실상 레벨 1짜리 인간이었다. 계산이 안 맞는다는 건 안다. 하지만 저택에 남는 것보다는 숲에서 죽는 쪽이 그나마 내 발로 고른 죽음이었다. 위험한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택 안에서 사냥개에게 물려 죽는 것보다는, 숲속에서 굶어 죽는 게 그나마 내가 고를 수 있는 죽음이었다. 선택의 폭이 넓다고 좋은 게 아니다. 나는 그중 가장 덜 억울한 걸 골랐을 뿐이다. 마차는 날이 밝을 때까지 달렸다. 마부는 중간에 한 번 물을 마시겠다며 마차를 세웠는데, 그때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저 힐끔거리기만 했다. 도망자를 태운 게 처음은 아닌 눈치였다. 숲의 초입에 도착했을 때, 마부는 마차를 세우고 다시는 이 근처에 오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서둘러 방향을 돌렸다. 마차가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제 뒤로 돌아갈 다리도 없다. 나는 짐을 메고 숲을 올려다봤다. 나무는 유난히 검었고, 잎사귀 사이로 새어드는 빛조차 회색빛이었다. 뿌리는 뒤엉켜 땅 위로 솟아 있었고, 줄기마다 이끼가 얼룩덜룩 덮여 있었다. 저 안쪽 어디선가 낮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 목소리는 아니었다.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 나뭇가지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이따금 뭔가 무거운 게 땅을 딛는 소리. 게임에서는 이런 배경음을 들으면서도 컨트롤러를 쥔 손이 편안했다. 지금은 그 소리 하나하나가 심장을 조였다. 됐다. 여기가 내 새 집이다. 나는 발을 뗐다. 숲의 그림자가 발목을 감싸는 순간, 등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직 먼 거리였지만, 분명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몇 마리인지는 소리로 가늠이 안 됐다. 다만 하나는 아니었다. 나는 화로 끈을 다시 조여 매고, 재료 상자를 품에 끌어안았다. 저 소리가 가까워지기 전에 숲 안쪽으로 몸을 숨겨야 한다. 몬스터 밀도가 가장 높은 숲이라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뒤에서 쫓아오는 것들보다는 덜 무서웠다. 말발굽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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