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역인데 제자가 여신급이라니

2화

말발굽 소리는 다행히 숲 어귀에서 멈췄다. 나는 나무 사이에 몸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말발굽은 몇 번 더 땅을 긁는 소리를 내다가, 이내 방향을 돌려 멀어졌다. 사냥개들이 낮게 짖는 소리도 함께 잦아들었다. 사냥개들도 심연숲까지는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유는 뻔했다. 게임에서도 그랬으니까. NPC들이 배치한 몰이꾼들은 딱 숲의 경계선까지만 추격하도록 설정돼 있었다. 숲 안쪽은 위험 지역이라, 개들조차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는 거였다. 다행이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붙어 있었다. 숨소리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리고 발밑의 흙이 더 이상 진동하지 않는 걸 확인할 때까지. 성급하게 움직였다가 다시 발견되는 것보다는, 조금 더 기다리는 쪽이 나았다. 숲은 걸을수록 어두워졌다. 나무들이 빽빽해질수록 하늘이 좁아졌고, 그 좁은 틈으로 들어오는 빛도 점점 회색에 가까워졌다. 발밑의 흙은 젖어 있었고, 나뭇가지 사이로 스치는 바람에서는 비린 냄새가 났다. 짐승의 피 냄새인지 썩은 낙엽 냄새인지 구분이 안 됐다. 구분이 안 되면, 일단 둘 다라고 생각하는 게 안전했다. 나는 게임 속 지식을 다시 꺼냈다. 이 숲의 몬스터 서식지는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초입은 저레벨 늑대형 몬스터 구역이었다. 회색늑대, 들개형 몬스터들이 낮은 레벨의 플레이어를 상대하는 튜토리얼 스팟이었으니, 위험도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중심부는 곤충형 몬스터의 영역이었다. 여기부터는 좀 골치가 아팠다.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종류가 많았고, 독을 쓰는 개체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안쪽 깊은 골짜기는, 게임 위키에도 제대로 언급조차 안 될 정도로 위험한 구역이었다. 레이드용 필드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 혼자서는 절대 접근할 수 없는 곳. 나는 초입과 중심부 사이, 완충 지대를 찾아야 했다. 늑대는 상대할 수 있어도 벌레떼는 무리다. 벌레는 숫자로 밀고 들어오니까. 두 시간쯤 걸었을까, 버려진 벌목꾼의 오두막을 발견했다. 지붕 한쪽이 무너져 있었고, 벽에는 발톱으로 긁은 자국이 선명했다. 누가 살다 버리고 간 흔적치고는 험했다. 하지만 뼈대는 튼튼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상태를 살폈다. 기둥은 썩지 않았고, 바닥도 무너지지 않았다. 벽 한쪽이 뜯겨나가긴 했지만, 그건 짐승이 낸 흔적이지 구조적 결함은 아니었다. 나는 벽을 두드려보고, 바닥을 발로 눌러보고, 지붕 틀을 올려다봤다. 괜찮다. 손볼 수 있다. 나흘 동안 나는 오두막을 고쳤다. 첫날은 지붕이었다. 무너진 부분에 나뭇가지를 엮어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넓은 잎사귀와 나무껍질을 겹겹이 덮었다. 게임에서 본 저레벨 건축 자재 배치법을 그대로 따라 했다. 비가 오면 물이 새겠지만,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을 정도였다. 둘째 날은 벽이었다. 짐승이 뜯어놓은 틈을 흙과 나무껍질로 메웠다. 흙을 개서 벽에 바르는 작업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갔다. 손톱 밑이 다 갈라졌다. 나는 손을 내려다보며 잠깐 생각했다. 이 손으로 컴퓨터 자판 두드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흙을 바르고 있다. 셋째 날은 문이었다. 마력이 없어도 작동하는 기계식 잠금장치를 달았다. 게임에서 봤던 저레벨 함정 설계도를 응용한 것이었다. 원래는 몬스터를 가둬두는 함정용 장치였는데, 방향을 바꾸면 밖에서 침입자를 막는 용도로도 쓸 수 있었다. 나뭇가지와 밧줄, 작은 돌추를 이용한 원시적인 걸쇠였지만, 적어도 늑대가 코로 밀어서 여는 것보다는 나았다. 넷째 날은 마무리였다. 바닥에 마른 풀을 깔고, 창문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구멍에 천을 덧대고, 화로 자리를 다졌다. 오두막이라고는 해도 이 정도면 게임 초반 세이브 포인트급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편의 기능은 이 세계에는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연금술 화로는 오두막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게 없으면 나는 이 숲에서 하루도 못 버틴다. 연금술이라는 게 거창하게 들리지만, 내가 하는 건 마력을 쓰는 게 아니었다. 나는 재료의 성질과 조합 비율을 게임에서 외운 그대로 재현할 뿐이었다. 마력 없이도 되는 방식이었다. 정확히는, 마력이 필요 없는 조합식만 골라 쓸 수 있었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덕분에 내가 만드는 물건은 항상 최하급이었다. 독을 중화하는 물약, 상처를 아물리는 연고, 늑대를 쫓는 향료 주머니. 게임 기준으로는 초보자 상점에서 파는 잡템이었다. 상점에 가면 동화 몇 개로 살 수 있는, 그야말로 잡화 수준의 물건들. 하지만 이 숲에서는 그 잡템 하나가 목숨을 살렸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게임에서는 인벤토리 구석에 처박아두고 잊어버리던 물건들이, 여기서는 내 생존 도구 전부였다. 화로에 불을 붙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마석 없이는 화력을 조절할 방법이 없었으니, 나는 순전히 나무의 밀도와 바람의 방향으로 불의 세기를 맞춰야 했다. 몇 번이나 불을 꺼뜨리고 다시 붙이는 사이, 화로 옆에는 타다 만 나뭇가지가 수북이 쌓였다. 그래도 결국은 됐다. 물약 몇 병, 연고 한 통, 향료 주머니 세 개. 이 정도면, 며칠은 더 버틸 수 있다. 닷새째 되는 날, 나는 숲 초입까지 나가 재료를 채집했다. 은빛 이끼, 뿌리가 붉은 풀, 늑대의 발톱. 하나같이 흔한 재료였지만, 이 숲의 것들은 유난히 짙은 냄새를 풍겼다. 은빛 이끼는 손끝에 닿기만 해도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고, 뿌리가 붉은 풀은 뽑는 순간 진한 흙냄새 대신 쇠 냄새가 났다. 늑대의 발톱은 굳이 손질된 사체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나무뿌리 사이에 부러진 채 박혀 있는 걸 주워도 충분했다. 위험한 곳에서 자란 것일수록 재료의 효능이 높다는 건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위험도가 높은 필드일수록 드롭되는 재료의 등급이 올라가는 건 기본 공식이었다. 나는 그걸 믿고 손을 뻗었다. 손을 뻗을 때마다 조금씩 겁이 났지만, 겁이 난다고 굶어 죽을 수는 없었다. 채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는 발밑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다. 핏자국이었다. 짐승의 피는 아니었다. 짐승의 핏자국이라면 이보다 짙고 굵게 튀어야 했다. 색이 옅고, 점점이 이어진 자국이 사람 발걸음 폭과 비슷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자국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괜찮다. 관여하지 않는다. 그게 원칙이었다. 나는 눈에 띄지 않는 게 목표였다. 사람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건, 이 근처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그건 곧 내 존재도 누군가에게 발견될 확률이 있다는 뜻이었다. 오두막을 나흘 동안 손봐놓은 게 헛일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누군가 내 냄새를 맡고, 내 흔적을 밟고 따라오면, 나는 다시 도망쳐야 한다. 나는 발자국을 무시하고 오두막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몇 걸음도 못 가서, 바람을 타고 희미한 피 냄새가 풍겨왔다. 짐승의 피 냄새와는 달랐다. 쇠 냄새에 땀 냄새가 섞인,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사람의 흔적에 가까웠다. 나는 그런 흔적을 몇 번이나 게임 속에서 접해본 적이 있었다. NPC의 부상 상태를 알리는 연출. 하지만 여긴 게임이 아니었다. 저 냄새는 화면 속 효과가 아니라, 진짜 사람의 몸에서 나는 냄새였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관여하지 않는다. 원칙은 원칙이다. 하지만 발이 저절로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이유는 나도 몰랐다. 그냥, 그 냄새가 너무 희미했다. 희미하다는 건, 피를 흘린 채 오래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목청 높여 도움을 청할 힘도 없는 상태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런 흔적을 무시하는 방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다. 망했다. 이러다 정말 원칙이고 뭐고 다 무너지겠다. 나는 짐을 내려놓고 냄새를 따라 걸었다. 발밑의 핏자국이 점점 짙어졌다. 옅던 색이 점차 붉게 변했고, 자국 사이의 간격도 좁아졌다. 누군가 걸음을 옮길 힘조차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무뿌리 사이, 축축한 낙엽더미 위로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사람이었다. 아니, 아직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크기였다. 소녀였다. 낙엽더미에 반쯤 파묻힌 채, 팔 하나를 몸 아래로 접고 웅크리고 있었다. 옷은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흙과 피로 얼룩져 있었고,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새하얗다 못해 푸른빛이 돌았다. 가느다란 숨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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