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박씨와 손을 잡은 지 나흘째, 우리는 숲 한복판에 버려둔 세탁기를 옮겨온 뒤 왕도 외곽의 버려진 창고를 아지트로 삼았다.
원래는 곡물 창고였다는데, 지금은 곰팡이 냄새와 쥐똥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찌르는 폐허에 불과했다. 천장 한쪽은 뻥 뚫려 있어서 밤이 되면 별빛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왔고, 바닥은 삐걱거리는 나무판자로 되어 있어 발을 디딜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그래도 이곳만큼 우리 둘의 밀담에 어울리는 장소는 없었다. 왕도 순찰대도 이런 폐창고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박씨는 옛 인맥을 통해 왕실 마도구에 관한 정보를 계속 물어다 줬는데, 그 정보의 핵심은 하나였다. 왕실의 주요 마도구, 특히 근위대와 왕족 호위용 마도구는 하나같이 저주를 원료로 삼는 오래된 방식으로 제작된다는 것.
"이게 다 몇백 년 전 방식이오. 지금은 다들 정상적인 마력석을 쓰는데, 왕실만 여전히 이 짓거리를 하지."
박씨가 침을 튀기며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오래 묵은 원한 같은 게 배어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왕실을 미워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근위대 마도구는 손대기 어렵소. 늘 몸에 지니고 다니니까."
박씨가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손끝으로 짚어가며 왕궁 주변 구조를 하나하나 짚어주는데, 그 손짓이 어찌나 익숙한지 예전에 왕실 소속이었던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그 지도 위, 왕궁 외곽에 그려진 훈련장 표시를 손끝으로 짚었다.
"훈련할 때는 벗어두지 않을까요?"
"글쎄... 그럴 수도 있소만, 위험하오."
위험. 그 단어가 오히려 나를 자극했다. 삼 년간 주유소에서 억울하게 당한 일들, 상사한테 욕먹고 손님한테 갑질당하고 그러면서도 참았던 시간들, 그리고 며칠 전 왕궁에서 당한 모욕까지, 쌓인 감정이 이제는 무모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그냥 복수였다. 삼 년치 억울함을 갚아줄 방법이 드디어 생겼는데, 위험하다고 물러설 이유가 뭐가 있나.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되돌릴 곳도 없었다.
"할 겁니다. 위험해도."
내 대답에 박씨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에서 걱정과 기대가 반씩 섞여 있는 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 나는 낡은 외투를 뒤집어쓰고 훈련장 근처로 숨어들었다. 발걸음마다 심장이 튀어 오르는 것 같았고,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하나에도 온몸이 얼어붙었다. 박씨의 정보대로 근위대원들은 훈련이 끝나면 마도구가 담긴 상자를 탈의실 근처에 벗어두는 습관이 있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손끝이 떨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러다 심장마비로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쿵쿵거리는 소리가 귓속에서 울렸다. 그래도 나는 창고 벽을 타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멀리서 근위대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훈련이 힘들었다며 서로 놀리는 목소리였는데, 저들이 벗어둔 상자 하나에 왕국의 위신이 걸려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싶었다.
상자 안에는 검 한 자루와 방패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둘 다 검은 기운이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안개처럼 검신을 감싸고 흐르는 그 기운을 보고 있자니, 소름이 쫙 돋았다. 이헌준의 최측근 근위대장이 쓰는 물건이라고 박씨가 미리 확인해 준 것들이었다.
나는 걸레를 꺼내 재빨리 검날에 문질렀다.
문지르는 순간, 검은 기운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게 눈앞에서 보였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그 어두운 안개가 걸레 속으로 사라지고 검이 그냥 평범한 쇠붙이로 변했다. 방패도 마찬가지였다. 손끝에 남은 감각이 이상했다.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 아니면 뭔가가 스며드는 느낌이었는데 그때는 그게 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창고까지 도착했을 때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서 한동안 말도 제대로 못 했다.
다음 날, 왕궁 근위대 훈련장에서 소란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왕도 전체에 퍼졌다.
"근위대장님의 마도구가 갑자기 힘을 잃었다더라."
"그것도 이헌준 왕자님이 직접 보시는 앞에서 그랬다더군."
"세상에, 왕실 마도구가 그렇게 쉽게 망가질 수가 있나?"
소문을 전해준 건 박씨였는데, 그는 창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숨도 못 고르며 이야기를 쏟아냈다. 시장에서 들었다는 이야기, 술집에서 술꾼들이 떠들던 이야기, 심지어 근위대 소속 지인한테 직접 들었다는 이야기까지, 온갖 경로를 통해 들어온 소문들을 두서없이 뒤섞어 전했다.
이헌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는 목격담, 근위대장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는 이야기, 심지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까지, 나는 그 모든 걸 들으며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통쾌함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됐다, 됐어! 성공이야!"
나는 창고 안에서 혼자 소리쳤다. 삼 년치 억울함이 한 번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주유소에서 손님한테 욕먹었던 것도, 사장한테 무시당했던 것도, 이헌준한테 모욕당했던 것도, 전부 이 한순간을 위한 준비였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박씨도 신이 나서 창고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손뼉을 쳤다.
"거참, 대단하시오! 이 정도면 왕실도 발칵 뒤집혔겠소!"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손끝이 저릿저릿해지며, 팔 전체에 검은 기운 같은 게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개미가 피부 밑을 기어다니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이었고, 그 감각은 순식간에 팔꿈치까지 번져나갔다.
"어, 어어?"
손등에 실핏줄처럼 검은 무늬가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마치 방금 씻어낸 저주의 일부가 나에게 옮겨붙은 것 같은 감각이었다. 나는 급히 팔을 걷어 살펴봤지만 겉으로는 아무 흔적도 없었다. 분명 방금 봤는데, 손등을 뒤집고 다시 봐도 그저 평범한 피부일 뿐이었다.
"왜 그러오?"
박씨가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며 대답을 고민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방금 내 몸에서 벌어진 일을 나조차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
"...아니에요. 잠깐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는 걸 감출 수 없었다. 이 능력이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몸으로 직접 느끼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창고 구석에 앉아 손을 몇 번이고 들여다봤다. 어둠 속에서 손등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혹시라도 그 검은 무늬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흔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저주를 씻어낼 때마다 이런 반동이 생긴다면, 이건 그냥 만능 치트키가 아니라 대가를 요구하는 능력이었다. 그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 능력을 쓸 수 있을까. 매번 저주의 일부가 내 몸에 옮겨붙는다면, 언젠가는 그게 쌓여서 내 몸을 잠식해버리는 게 아닐까. 별의별 불길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박씨는 벌써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저 사람은 태평하게도 잘도 자는구나 싶어서 잠시 얄미운 마음이 들었지만, 사실 나도 피곤에 절어 눈이 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창고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박씨가 재빨리 등불을 껐다.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최소 세 명, 아니 네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갑옷이 부딪히는 금속음까지 섞여 있었는데, 그 소리가 점점 창고 문 앞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근위대 병사들이오. 여기까지 냄새를 맡은 건가?"
박씨가 낮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도 긴장이 잔뜩 배어 있었다. 나는 손등에 남아 있을지 모를 검은 흔적을 급히 소매로 가리며 숨을 죽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통쾌함에 젖어 있던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혹시 발각된 걸까. 아니면 그냥 순찰인가. 온갖 가능성이 머릿속에서 뒤엉켰지만,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문틈으로 등불 빛이 새어 들어왔다. 누군가 창고 문을 천천히 밀어 열고 있었다. 나무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크게 들렸다.
나는 아직 몰랐다. 저 문 뒤에 서 있는 사람의 눈이, 이미 내 손등에서 사라져가는 검은 흔적의 잔상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