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발소리는 마물이 아니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온몸의 근육이 동시에 굳는 걸 느꼈다. 마물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마물은 예측이 가능했으니까. 으르렁거리고, 달려오고, 물어뜯는다. 그게 마물의 문법이었다. 그런데 지금 들리는 이 발소리는, 절뚝, 절뚝, 절뚝, 하는 불규칙한 박자로 다가오고 있었다. 규칙성이 없는 소리야말로 가장 무서운 법이다.
숲을 헤치고 나온 건 다 낡아빠진 마차 한 대와, 그 옆을 절뚝거리며 걷는 중년 남자였다. 남자는 헐렁한 외투 차림에 등에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었는데, 인상이 순박한 건지 지쳐서 순박해 보이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표정이 흐릿했다. 눈두덩이는 퀭했고, 뺨은 광대뼈가 도드라질 만큼 야위었으며, 걸음걸이는 오랜 시간 잘 먹지 못한 사람 특유의 흔들림이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손에 쥐고 있던 걸레를 등 뒤로 숨겼다. 왜 숨겼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이 낡은 걸레가 방금 마물 한 마리를 쇠막대기로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이, 남한테 들켜서는 안 될 비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기, 사람이오?"
남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목소리에는 경계심보다 반가움이 더 짙게 묻어 있었다. 나는 걸레를 쥔 손을 슬쩍 뒤로 숨기며 경계했다.
"...사람인데요."
"다행이군. 요즘 숲엔 마물뿐이라 사람 목소리 들으니 반갑소."
남자는 자신을 박씨라 소개했다. 원래는 왕도에서 마도구를 취급하는 상인이었으나 큰 거래에서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고 떠돌이가 됐다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목소리에는 원망도, 자조도 없었다. 그냥 남의 이야기를 하듯 무심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진짜처럼 들렸다.
인생이 재수 없게 흘러가는 이야기라면 나도 못지않다는 생각에, 나는 슬쩍 마음의 문을 열었다. 동병상련이라는 게 이런 걸까. 세상에는 나만큼 운이 없는 인간이 또 있었다는 게,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근데 방금 저기 쓰러진 놈은 뭔 일이오?"
박씨가 널브러진 마물을 발끝으로 툭 건드리며 물었다. 마물은 미동도 없었다. 완전히 죽은 것도 아니고, 완전히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그 애매한 상태로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말을 해야 할까. 말을 하면 뭐가 달라질까. 어쩌면 이 사람도 이헌준처럼, 내 스킬 이름을 듣는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할 수도 있었다. 세차. 판타지 세계에 던져진 인간의 스킬이 세차라니, 누가 들어도 코미디였다.
하지만 이 사람마저 나를 비웃으면 그냥 여기서 죽은 척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더 잃을 것도 없었다.
"제가 이걸로 저 창의 뭔가를 닦았더니, 저놈이 저렇게 됐어요."
걸레를 들어 보였다. 박씨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동공이 확장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 창, 이리 좀."
박씨는 창을 주워 이리저리 살피더니 낮은 신음을 흘렸다. 손끝으로 창의 표면을 문지르고, 코를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고, 심지어 귀에 가까이 대고 뭔가를 확인하듯 미간을 좁혔다. 그 모든 행동이 전문가의 습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건 저주가 걸린 물건이었소. 흑염화라는 마도구 계열인데, 검은 기운이 강할수록 위력이 세지는 방식이지.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죽어 있소. 그냥 쇠막대기요."
"제 걸레 때문에요?"
"모르겠소만, 우연이 아닌 것 같소."
박씨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나는 슬쩍 걸레를 다시 뒤로 숨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왕도의 마도구들, 특히 왕실 소속 마도구는 대부분 저주에 기반한 것들이오. 저주는 더러움과 원한을 먹고 자라는 법이지. 그걸 아는 사람이 없어서 다들 강한 마도구라 부르며 떠받들지만, 사실은 그냥 오염물이오."
오염물.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됐다. 오염물, 오염물, 오염물. 그러니까 왕실 마도구가 강력한 이유가 저주, 즉 더러움에 기반한다면.
"제 스킬이 세차라면..."
"그 더러움을 씻어낼 수 있다는 뜻이지."
박씨가 내 말을 받아 결론을 내렸다.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다시 걸레를 내려다봤다. 손이 떨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게, 이 낡아빠진 걸레 조각이, 이 세계 전체의 규칙을 흔들 수 있는 물건이라니.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장면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첫 번째. 소환식 당일, 나를 향해 폭소를 터뜨렸던 이헌준의 얼굴.
두 번째. "세차라니, 이건 진짜 역대급 잡스킬이네." 하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던 그 순간.
세 번째. 파티에서 쫓겨나며 등에 날아온 돌멩이 하나.
네 번째. 숲속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며 이젠 정말 죽는구나 싶었던 그 새벽.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 이 걸레 한 장으로 뒤집힐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를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흥분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해봐야겠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애써 힘을 줬다. 박씨는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봤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앞에 마물 무리가 하나 있소. 상처 입은 놈들이라 약하긴 한데, 시험해 보고 싶으면 따라오시오."
"약하다는 게, 얼마나 약한 건데요?"
"당신 발로 차도 안 죽을 정도요. 다만 물리면 골치 아프지."
전혀 안심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내게 필요한 건 안심이 아니라 확신이었으니까.
우리는 조심스레 숲 안쪽으로 이동했다. 박씨는 절뚝이는 걸음으로도 놀랍도록 조용히 움직였다. 나뭇가지를 밟아도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고, 마른 잎을 스치는 옷자락 소리도 최소한이었다. 떠돌이 생활이 몸에 새겨놓은 생존 기술 같았다.
얼마 가지 않아 웅덩이 근처에 마물 세 마리가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게 보였는데, 놈들의 몸에는 하나같이 검은 안개 같은 게 서려 있었다. 그 안개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놈들의 몸 주변을 천천히 휘감고 있었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코끝에 비릿하고 탁한 냄새가 스쳤다. 썩은 물 냄새와 쇳내가 섞인, 형용하기 힘든 악취였다.
나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끼며 걸레를 꽉 움켜쥐었다. 몸이 벌벌 떨렸다. 손끝이 저릿했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고, 입안은 바짝 말라 있었다. 그래도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박씨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천천히. 놈들은 시력이 나쁘지만 움직임은 예민하게 감지하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죽였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발끝으로 조심스레 무게를 옮기며 마물에게 다가갔다.
첫 번째 마물의 발목 근처에 걸레를 갖다 댔다.
검은 기운이 스며들듯 걸레로 빨려 들어갔고, 마물이 그대로 힘을 잃었다. 마치 전원이 뽑힌 기계처럼, 순식간에 모든 움직임이 정지했다.
두 번째. 세 번째. 똑같은 결과였다.
세 마리 모두, 검은 안개가 걸레 속으로 흡수되듯 사라지자마자, 미동도 없이 쓰러졌다.
"됐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우연이 아니었다. 이건 재현 가능한 능력이었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어도, 네 번은 우연일 수 없다. 이건 실험이었고, 실험은 결과를 냈다.
박씨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놀라움과 계산이 절반씩 섞인, 상인 특유의 얼굴이었다.
"당신, 이거 왕도에 알려지면 큰일 나겠는데."
큰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나는 그 순간 이헌준의 비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만회소환, 잡스러운 직업, 추방. 그 모든 모욕을 되갚아줄 방법이 지금 내 손안에 있었다.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계산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왕실 마도구가 전부 저주 기반이라면, 왕궁 창고에 있는 무기와 방어구, 심지어 왕의 왕관까지도 내 걸레 한 번에 쇠붙이로 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 파급력이 어디까지일지, 나는 감히 상상하기가 두려웠다.
"박씨 아저씨,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어요?"
박씨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오랜 세월 세상에 배신당한 사람의 그늘이 짙게 남아 있었다.
"어차피 떠돌이 신세인데, 뭐. 재밌겠구려."
"후회 안 하실 거예요?"
"후회는 이미 오래전에 다 해봤소. 이제 와서 뭘 더 후회하겠소."
그 말이 왠지 마음에 걸리면서도, 든든했다. 인생의 밑바닥까지 가본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여유였다.
그렇게 손을 맞잡은 순간,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이 작은 결심이 며칠 뒤 왕궁 전체를 뒤흔들 사건의 시작이라는 걸.
그리고 그 시작의 끝에서, 나를 추방했던 이헌준의 얼굴이 완전히 다른 색으로 질려버릴 거라는 사실도, 지금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