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강원도 산골, 해발 700미터짜리 고갯길 중턱에 자리 잡은 만재주유소. 간판 불빛의 절반은 나가 있었고, 나머지 절반도 언제 나갈지 모르는 상태로 근근이 버티고 있었으며, 그 밑에서 삼 년째 혼자 카운터를 지키는 게 나, 김다혜였다.
서울에서 팀장까지 달았다가 과로로 실려 간 게 서른 살 겨울이었고, 병원에서 퇴사서를 쓰고 나온 뒤로 도시 근처에는 발도 들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흘러들어 온 곳이 여기였다. 아버지가 남긴 낡은 주유소 하나, 컨테이너 숙소 하나, 그리고 매달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대출 이자 하나. 그게 내가 가진 전부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그래도 희망 같은 게 있었다. 산 공기 좋고, 사람 스트레스 없고, 밤에는 별도 보이고. 그런데 그 희망이라는 게 딱 반년 만에 증발했다. 손님은 하루 스무 명이 채 안 됐고, 그중 절반은 카드를 긁고 나서 "여기 결제 되긴 하는 거예요?"라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머지 절반은 기름값을 깎아달라고 흥정을 걸었다. 강원도 산골 주유소에서 흥정이라니, 이게 재래시장인가.
오늘도 아침부터 재수가 없었다.
첫차부터 카드 단말기가 먹통이었고, 손님은 그걸 내 탓처럼 노려보다 기름값을 현금으로 던지듯 내고 갔으며, 나는 단말기 리셋 버튼을 열 번쯤 누르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신 반복했다. 반복할수록 목이 아팠다. 낮에는 지나가던 트럭이 주유기 하나를 긁고 그냥 가버렸는데, 그 순간 나는 카운터 안에서 라면 국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려 기침을 쏟아냈다. 밖으로 뛰쳐나갔을 때는 트럭은 이미 고갯길 너머로 사라진 뒤였고, 주유기 몸통에는 길고 흉한 스크래치만 남아 있었다.
보험 접수를 하려고 블랙박스를 확인했는데 하필 그날 메모리카드가 맛이 가 있었다. 화면에는 "저장 오류"라는 글자만 깜빡였고, 나는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삼십 분 동안 카드를 뺐다 꼈다 하며 인생의 부조리에 대해 곱씹었다. 씨발, 이게 인간의 삶이냐. 삼 년째 이 짓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순탄하게 넘어간 하루가 없었다. 인과율이 나만 골라서 억까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나는 컨테이너 숙소 안에서 라면 물을 올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그 보글거리는 소리가 오늘 하루의 모든 짜증을 대신 표현해주는 것 같았다. 끓어라, 끓어라, 다 태워버려라.
그리고 그 여자가 나타난 건 저녁 여덟 시쯤이었다.
빨간 스포츠카가 미친 듯이 속도를 줄이며 주유소 앞에 멈춰 섰는데,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가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나는 라면 냄비를 놓칠 뻔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하이힐이 먼저 땅을 짓밟았고, 뒤이어 나온 얼굴은 딱 봐도 텔레비전에서나 볼 법한 종류였다. 윤서은. 나중에 알았지만 그게 이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명 하나 없는 이 산골 주유소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실크 소재로 보이는 블라우스, 손목에 걸린 시계는 내 한 달 월급으로도 못 살 것 같았고, 걸음걸이마저 외줄을 밟는 사람처럼 균형이 완벽했다. 나는 저런 애가 왜 이 고갯길을 지나가나 잠깐 궁금했지만, 굳이 물을 이유는 없었다.
"기름 넣어요. 빨리."
존댓말인데 명령이었다. 억양 자체가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방식이었고, 나는 그 말투에 이미 익숙했다. 도시에서도 그런 인간들 상대로 팀장 노릇을 했었으니까. 나는 익숙하게 주유기를 뽑아 들었고, 서은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나를 투명 인간처럼 대했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 손끝으로 화면을 튕기는 걸 보니, 아마 SNS 댓글을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열여덟 살이라기엔 눈빛이 지나치게 단단했고, 손톱 끝까지 관리한 흔적이 완벽했으며, 걸치고 있는 옷 한 벌이 이 주유소 한 달 매출보다 비쌀 것 같은 인간이었다. 주유기를 꽂는 내 손끝과 스마트폰을 두드리는 저 여자의 손끝이 이렇게까지 다른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게, 문득 우습기도 했다.
"휘발유예요?"
"몰라요. 그냥 넣던 거 넣으세요."
몰라요. 이 대답이 얼마나 어이없는지, 나는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산속 처음 보는 주유소에 와서 넣던 거 넣으라니, 내가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결국 계기판 스티커를 확인하고서야 휘발유차라는 걸 알았다.
비가 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처음에는 흩날리는 정도였는데, 십 초도 안 되어 굵은 빗줄기로 변했고, 산 중턱 특유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제대로 발동을 걸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서은이 짜증스럽게 컨테이너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고, 하이힐이 물웅덩이에 젖는 걸 보며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 씨.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혼잣말인데 다 들리게 하는 말투였다. 나는 손님을 밖에 세워둘 수 없어 숙소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게 실수였다. 아니, 실수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그냥 인과율이 억까를 부린 순간이었다.
컨테이너 안쪽, 삼 년 전 중고로 산 세탁기가 그날따라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덜덜덜, 하는 진동음이 평소보다 심했고, 나는 그저 탈수 모드가 고장 난 줄 알고 별생각 없이 뚜껑을 열었다. 서은은 컨테이너 구석에 서서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척했지만, 시선은 계속 세탁기 쪽으로 향해 있었다. 아마 저 여자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던 모양이다.
세탁기 통 안에서 물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었고, 세제 거품이 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텅 빈 통 안쪽에서, 파랗고 차가운 빛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거?"
서은이 소리쳤고, 나도 뭐라 대답할 틈이 없었다. 빛은 순식간에 컨테이너 전체를 집어삼켰고, 발밑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세상이 하얗게 지워졌다.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고, 손가락 끝이 저릿저릿했으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감각만 또렷하게 남았다.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이거 가스 폭발인가, 감전인가, 아니면 그냥 내가 과로로 다시 쓰러진 건가. 어느 쪽이든 결말이 좋을 것 같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건 서은의 얼굴이었다. 짜증에서 경악으로 바뀌는 그 표정. 완벽하게 관리된 저 얼굴이 처음으로 무너지는 순간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나는, 낡은 세탁기 한 대와 함께, 이 세계에서 사라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대리석 바닥 위에 엎어져 있었다.
차갑고 매끈한 바닥이 뺨에 닿았고, 코끝으로 향냄새 비슷한 게 스쳤다. 눈부신 샹들리에, 붉은 카펫, 그리고 나를 둘러싼 수십 개의 눈동자. 나는 순간 이게 무슨 초대형 드라마 세트장인가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광경이었다.
서은은 벌써 몸을 일으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화보 촬영이라도 하는 듯 자세가 완벽했다. 조금 전까지 소나기에 하이힐을 적셨다며 짜증 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표정 전환이 순식간이었다.
"...뭐야, 여기."
내 목소리가 텅 빈 홀에 울렸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사방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낮은 웅성거림이 점점 하나의 단어로 모아졌다.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 발음이 이상했고, 억양도 낯설었다. 그런데 몇 번 반복되자 그 단어가 또렷하게 들렸다.
"성녀님이시다!"
누군가 소리쳤다. 시선이 일제히 서은에게 쏠렸다. 서은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오히려 턱을 살짝 들어 올렸는데, 그 표정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마치 이런 상황을 기다려온 사람 같았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저 여자, 지금 이 상황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즐기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화려한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마치 예를 갖추듯 허리를 숙이고 있었고, 몇몇은 눈물까지 글썽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나는 세탁기 뚜껑을 열었던 걸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누군가의 시선이 나에게로 옮겨졌다. 그 눈빛이 순식간에 식어가는 걸 나는 똑똑히 보았다.
"저건... 뭐지?"
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였다. 계단 위, 금빛 자수가 놓인 옷을 입은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를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처리해야 할 오류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 속에는 경멸도, 호기심도 아닌, 그냥 '있어선 안 될 것'을 발견했을 때의 냉담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대리석 바닥이 차가운 것과는 다른 종류의 한기였다.
성녀는 환대받고, 나는 오류로 분류된다. 이게 대체 어떤 세계관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상황이 나한테 좋게 굴러갈 리가 없다는 것.
나는 아직 몰랐다. 저 남자가 앞으로 내 인생을 몇 번이나 짓밟을 존재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