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성문 밖으로 쫓겨난 지 사흘째, 나는 나무뿌리를 씹어먹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사흘 전, 이세계로 소환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당신에게 주어진 스킬은 주유가 아니라 세차입니다"라는 말 한마디에 성문 밖으로 내던져진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은 완전히 조져버린 상태였다. 주유소 점장이 이세계에 소환되면 당연히 주유 스킬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세차라니. 세차라니!! 신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스킬을 준 건지 알 수가 없었고, 그 신을 만나면 꼭 한번 멱살을 잡고 따져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숲은 넓고 습했으며, 밤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낮에는 벌레 떼가 얼굴을 향해 돌진했다. 첫날 밤에는 부엉이인지 늑대인지 모를 소리에 잠도 못 자고 벌벌 떨었고, 둘째 날에는 벌레에 눈두덩이가 부어올라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서울에서 과로로 쓰러졌을 때도 이렇게까진 절망적이지 않았는데. 그때는 최소한 응급실이 있었고, 링거 맞으면서 유튜브라도 볼 수 있었으니까. 여긴 뭐, 아무것도 없었다. 편의점도 없고, 스마트폰도 안 되고, 심지어 화장실도 그냥 아무 데나 파야 했다.
"아, 조졌다. 진짜 조졌다."
나는 세탁기 옆에 쭈그려 앉아 혼자 중얼거렸다. 나와 함께 이 세계로 넘어온 세탁기는 어처구니없게도 소환 당시 내가 손에 들고 있던 유일한 물건이었는데, 원래는 우리 집 다용도실에서 삼 년째 굴러가던 낡은 세탁기였다. 이 무거운 걸 왜 계속 끌고 다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나와 함께 이 세계로 넘어온 물건이자, 나를 이 지옥으로 처넣은 원흉이었으니까. 어쩌면 이거라도 붙잡고 있어야 정신줄을 놓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이상한 미련 같은 게 있었다.
들고 다니기엔 미친 듯이 무거웠고, 끌고 다니기엔 바퀴도 없었다. 세 걸음 걷고 쉬고, 다섯 걸음 걷고 쉬고. 그러다 보니 사흘 동안 도망친 거리가 겨우 십 킬로미터도 안 됐다. 손바닥에는 이미 물집이 몇 개나 잡혔는지 셀 수도 없었다.
그러다 발견한 게 있었다.
숲 안쪽,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가 손에 잡힌 게 낡은 창 한 자루였다. 마물이 쓰던 것인지, 자루가 검게 부식되어 있었고 창날에는 시커먼 진액이 눌어붙어 있었으며 손에 쥐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뭔가 나쁜 기운이 도는 물건이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 확신이 아니라 온몸의 세포가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이거 만지면 안 될 것 같은데, 라는 직감. 근데 이미 손이 닿아버렸다.
시커먼 진액에서는 상한 계란과 시체 썩는 냄새를 반씩 섞어놓은 듯한 악취가 풍겼고, 나는 반사적으로 코를 틀어막으며 창을 놓으려 했다. 그런데 손이 이상하게 잘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창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그 순간, 숲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녹색 피부에 이빨이 삐뚤빼뚤한 뭔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물이었다.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괴물이 실제로 눈앞에 있으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손가락 끝이 벌벌 떨렸다. 키는 나보다 작았지만 팔뚝은 내 허벅지만 했고, 눈알은 노랗게 번뜩이며 나를 정확히 사냥감으로 인식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하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그 유명한 얼음땡 현상인가. 몸이 위험을 인지하면 오히려 굳어버린다던 그 이야기, 그게 지금 내 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으아아악!"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창을 그대로 던졌다. 정확히는 던졌다기보다 놓친 거였는데, 그 창이 근처 웅덩이에 처박히며 흙탕물을 뒤집어썼다. 마물은 창을 주우려는 듯 다가왔지만, 그전에 내가 반사적으로 손에 쥔 걸레를 그 창에 문질렀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흙이 묻은 걸 보면 닦아야 한다는 삼 년간의 주유소 근무 습관이 몸에서 튀어나온 거였다. 손님 차가 흙탕물을 튀기고 지나가면 곧바로 걸레 들고 뛰어가서 닦던 그 버릇이, 사람 목숨이 오가는 순간에도 그대로 나온 거였다. 인간의 몸에 새겨진 습관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그 순간, 창날에 눌어붙어 있던 시커먼 진액이 순식간에 벗겨져 나갔다.
마치 필터가 벗겨지는 것처럼, 지지직 소리를 내며 검은 기운이 걸레 표면으로 스며들어 사라졌고, 창은 그냥 낡고 평범한 쇠막대기로 변했다. 그리고 그 순간 마물이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악!"
마물의 몸에서도 검은 안개 같은 게 뿜어져 나오며 그대로 힘을 잃고 쓰러졌다. 마치 배터리가 방전된 로봇처럼, 팔다리가 축 늘어진 채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세상이 순간 정지한 것 같았다. 벌레 소리도, 바람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오직 내 심장 뛰는 소리만 귓속에서 울려댔다.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방금 벌어진 일을 이해하려 애썼다.
"...뭐야, 방금 뭐였어?"
손에 든 걸레를 다시 내려다봤다. 평범한 회색 걸레였다. 세탁기에서 꺼낸 뒤 한 번도 빨지 않은, 그냥 흙때 묻은 낡은 걸레. 이걸로 손님 차 사이드미러 닦던 게 어제 같은데.
그런데 저 창의 저주를 벗겨냈다. 그리고 그 저주가 사라지자, 그 저주에 의존하던 마물이 그대로 힘을 잃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거, 우연일까?
한 번은 우연일 수 있다. 두 번이면 필연이다. 근데 지금 이건 딱 한 번이었으니, 아직은 우연이라고 우겨볼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도 심장이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뛰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쓰러진 마물을 살폈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방금까지 나를 죽이려 들던 놈이 이렇게 무력해진 게 신기하면서도 무서웠다. 손끝으로 살짝 찔러봤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진짜 배터리 방전된 것처럼, 그냥 축 늘어져 있었다.
혹시 이 녀석, 저주받은 창을 무기로 쓰던 게 아니라 저 창의 저주 자체가 이 녀석의 힘의 근원이었던 건 아닐까? 저주가 사라지니까 힘도 같이 사라진 거라면.
"세차..."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주유소 점장으로 소환된 나에게 주어진 게 주유가 아니라 세차였다면, 그리고 그 세차라는 스킬이 이 세계의 저주나 마도구의 힘을 씻어내는 능력이라면.
머릿속에서 뭔가가 딸깍, 하고 맞아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지금까지 세차 스킬을 저주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이게 이 세계에서 가장 희귀하고 강력한 능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마도구도, 마물도, 어쩌면 이 세계 전체를 뒤덮은 저주들도 다 이 스킬로 씻어낼 수 있는 거라면.
갑자기 심장이 다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까까지의 공포와는 다른 종류의 두근거림이었다. 이건 뭐랄까, 로또 1등 당첨 문자를 받았는데 아직 그게 진짜인지 확신이 안 서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때, 숲 저편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개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걸레를 움켜쥐고 몸을 낮췄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고, 나뭇가지 사이로 그림자 여러 개가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발소리의 리듬이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무겁게, 누군가는 가볍게, 그리고 그 사이사이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주고받는 소리까지 섞여 들려왔다.
마물 무리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방금 마물 하나 처리한 것도 순전히 운이었는데, 저게 셋이든 넷이든 무리로 몰려온다면 이 걸레 하나로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나는 숨소리마저 죽이며 나무 뒤로 몸을 바짝 붙였다.
세탁기는 그대로 숲 한복판에 버려둔 채였다. 저걸 챙길 여유는 없었다. 지금은 살아야 했다.
나는 아직 몰랐다. 이 발소리의 주인이 마물이 아니라,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사람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