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용사님, 저한테 기대세요

4화

며칠 뒤, 천군 용사단이 다시 가게를 찾은 것은 오후의 볕이 유리창을 타고 넘어와 진열대 위에 옅은 그림자를 늘어뜨리던 시각이었다. 딸랑. 문에 매달린 종이 울리는 소리에 하준은 고개를 들었고, 마치 그들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카운터에서 일어나 맞이했지만, 문을 밀고 들어온 얼굴이 서윤이 아니라 백하린과 남소은 둘뿐이라는 사실에 순간 미묘한 위화감이 스쳤다. '단장이 없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뭔가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지난번 서윤이 상처를 숨기듯 팔을 쥐고 들어오던 모습이 잔상처럼 눈앞에 스쳤다가 사라졌다. 하린은 카운터 앞에 서자마자 팔짱을 낀 채 다소 신경질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단장은 안 와. 오늘은 우리 둘이서 필요한 것만 사가려고." 그 말투는 필요 이상으로 날이 서 있었고, 하준은 그 안에서 두 사람 사이의 냉기가 여전히 걷히지 않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소은은 그런 하린의 옆에 바짝 붙지도,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애매한 거리에서 여전히 후드를 눌러쓴 채 진열대 구석에 서 있었는데, 그 침묵이 어색함이 아니라 익숙함에서 나온 것처럼 보여 하준은 문득 이 두 사람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 싸워왔을지를 짐작해 보았다. 포션 병들이 조용히 진열대 위에서 빛을 받아 옅은 초록빛을 흘리고 있었고, 하준은 그 사이를 손끝으로 훑으며 무심한 얼굴로 필요한 물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광역 마법 쓰고 나면 회복이 얼마나 걸립니까." 하린이 갑작스레 소은 쪽을 돌아보며 날카롭게 물었는데, 그 목소리에는 단순한 궁금증이라기보다는 오래도록 쌓여 있던 불만이 날카롭게 벼려진 채 배어 있었다. "매번 네가 마법을 넓게 쏟아부으니까 회복이 늦어지는 거 아니야. 적만 노려서 쏘면 될 걸."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준은 손을 멈추고 귀를 세웠는데, 겉으로는 여전히 포션 병의 라벨을 확인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이 짧은 대화 하나가 팀의 균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소은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넓게 쏘지 않으면 네가 다쳐."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고, 하린은 그 말에 순간 멈칫하며 숨을 삼켰다가 이내 애써 코웃음을 쳤다. "필요 없어, 그런 배려." 말은 차갑게 잘라냈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짧은 정적 속에서 하린의 손끝이 옷자락을 살짝 움켜쥐는 것을, 하준은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저 애도 저렇게 매정하게 말할 사람은 아닌데.' 카운터 위에 놓인 포션들을 정리하는 손끝이 조금씩 느려졌고, 하준은 그 틈에 두 사람의 표정을 번갈아 살피며 속으로 생각을 이어갔다. '전위와 마도사 사이에 이 정도 거리가 있다면, 그 사이에서 리더가 짊어진 부담은 상상 이상이겠지.'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하준은 자연스럽게 서윤이 처음 이 가게에 들어섰던 순간을 떠올렸는데, 그때도 서윤은 지금 이 두 사람의 냉랭한 공기를 등에 짊어진 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어 보였었다. '그날도 저 웃음 뒤에 이런 균열이 있었던 건가.' 그 기억이 스치자 하준은 자신도 모르게 카운터 너머로 슬쩍 하린에게 말을 건넸다. "단장님은 요즘 좀 안 좋으신가요." 무심한 듯 던진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는 며칠 전부터 마음에 걸려 있던 무언가가 은근히 섞여 있었고, 그 질문 하나에 하린의 표정이 순간 살짝 굳는 것을 하준은 똑똑히 보았다. "……왜 그런 걸 묻지." 경계하듯 되묻는 목소리에는 방금 전 소은에게 쏘아붙이던 날카로움과는 다른 종류의 긴장이 섞여 있었다. "저번에 오셨을 때 표정이 안 좋아 보이셔서요. 상처도 그렇고." 그 말을 하는 동안 하준의 머릿속에는 그날의 장면이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는데, 서윤이 팔을 슬쩍 감싸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던 그 얼굴이, 지금 눈앞의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냉기와 겹쳐지면서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조여왔다. 하린은 잠시 침묵했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단장은 원래 그래. 아무한테도 안 기대. 그러다 무너지면 어쩌려는지." 그 말투에는 원망과 걱정이 뒤섞여 있어서, 단순히 서윤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서윤을 지켜보는 자신의 무력함을 토로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금까지 한 번도 시선을 들지 않던 소은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하린을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에는 놀라움과 함께 미묘한 원망이 뒤섞여 있어서 하준은 순간 숨을 죽였다. "……그건 네가 할 말이 아니지." 짧은 한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하린 역시 누군가에게 기대는 법을 모른다는 것을, 소은이 오래전부터 지켜봐 왔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다시 팽팽한 침묵이 감돌았고, 진열대의 포션 병들이 부딪히는 미세한 소리만이 그 정적을 간신히 메우고 있었는데, 하준은 그 틈을 이용해 조용히 두 사람에게 포션을 건네며 대화를 자연스럽게 마무리했다. "필요한 건 이걸로 충분할 겁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건조한 인사말에 하린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소은은 다시 고개를 숙인 채 후드 깊숙이 얼굴을 묻으며 하린의 뒤를 따라 걸었다. 딸랑.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모습이 거리 저편으로 사라지자, 가게 안에는 다시 오후의 정적만이 남았다. 하준은 카운터에 홀로 남아 방금 들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곱씹었다. '아무한테도 안 기댄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고, 그는 문득 자신도 모르게 서윤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늘 단정하게 정돈된 표정 뒤에 감춰져 있던 그 옅은 그늘, 팔을 감싸 쥐던 손끝의 미세한 떨림, 그리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지어 보이던 웃음까지, 그 모든 조각들이 지금 하린의 말과 겹쳐지면서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는 듯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사람일수록, 처음으로 기댈 곳을 만나면 무너지기 쉽지.' 그 생각과 함께 하준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쳤다가 곧 사라졌는데, 그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 안에 어떤 계산이 숨어 있는지 알아챈 사람은 이 조용한 가게 안에 아무도 없었다. 다만 카운터 위에 놓인 포션 병 하나가 창으로 들어온 볕에 반짝, 하고 흔들리는 그림자를 남겼을 뿐이었고, 하준은 그 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음에 서윤이 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조용히 그날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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