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달칵.
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만월잡화'의 문이 열렸을 때, 유하준은 카운터에 놓인 낡은 회계부를 정리하다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로 익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십 년이 넘도록 이 자리를 지켜온 가게였고, 그만큼 손님을 맞는 목소리도 몸에 새겨진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는데, 그러나 곧이어 가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침묵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펜을 내려놓고 천천히 눈을 들었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세 명의 인영이었는데, 하나같이 등에 짊어진 무기와 걸친 갑주의 광택만으로도 예사 손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낮은 조명 아래에서도 갑옷 표면에 새겨진 문양들이 은은하게 빛을 반사하는 것으로 보아 결코 값싼 물건들이 아니라는 것 또한 짐작할 수 있었으며, 특히 가장 앞에 선 여자의 검은 갑옷은 그 자체로 서늘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천군 용사단.'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그리고 가장 소모된 파티라는 것을 하준은 단번에 알아보았고, 마물의 근원을 봉인했다는 전설 같은 무용담과 함께 왕성의 벽화에까지 그 얼굴이 새겨졌다는 소문을 들은 지 벌써 몇 해가 흘렀는데도 이렇게 직접 마주하게 되니, 오랜만에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며 애써 표정을 다스렸다.
리더로 보이는 여자, 강서윤은 가게 안을 한 번 훑어보고는 진열대 쪽으로 걸어갔는데, 그 걸음걸이가 언뜻 보기엔 절도 있고 단단했지만 하준의 눈에는 미세하게 흔들리는 무게 중심이 그대로 잡혔고, 발끝을 딛는 방식이 지나치게 조심스럽다는 것에서 그는 그녀가 몸의 어딘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으며, 오랫동안 다친 사람들을 상대해온 잡화점 주인의 눈이 아니라면 결코 알아채지 못할 만큼 정교하게 감춰진 절뚝임이었다.
서윤의 뒤를 따르는 두 여자는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각자 다른 방향의 진열대를 향해 흩어졌는데, 백은색 갑옷을 두른 쪽은 팔짱을 낀 채 냉랭한 표정으로 벽을 훑었고, 이따금 콧방귀를 뀌듯 코끝을 찡그리며 진열된 물건들을 마치 조잡한 잡동사니 보듯 흘겨보았으며, 깊은 후드를 눌러쓴 다른 한 명은 아예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그 존재감이 지나치게 희미해서 마치 자신이 이 자리에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지우려 애쓰는 듯한 인상마저 주었고, 그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마치 서로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듯 팽팽했다.
'팀워크가 무너졌군.'
하준은 그 짧은 관찰만으로도 이들 사이에 어떤 균열이 있는지 대략 짐작이 갔고,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얼른 무표정으로 되돌렸다.
용사단이라 불리는 이들은 본래 왕국이 마물의 근원을 봉인하기 위해 선별한 최정예 인원들로, 그 결속력과 신뢰가 곧 전투력의 핵심이라 알려져 있었는데, 서로의 등을 맞대고 싸우는 이들 사이에 눈빛조차 마주치지 않으려는 냉기가 흐른다는 것은, 겉으로는 여전히 왕국의 영웅이라는 이름을 지키고 있는 이 파티가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곪아가고 있다는 뜻이었으며, 하준은 그 균열의 냄새를 맡는 데에 누구보다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서윤이 진열대 위에 놓인 회복 포션 하나를 집어 들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얼마나 갑니까."
짧고 건조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미묘하게 지친 기색이 섞여 있었고, 하준은 그것을 놓치지 않은 채 카운터를 돌아 나와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보통 등급의 상처엔 반나절, 심한 상처엔 그 두 배쯤 갑니다만."
대답을 이어가며 그는 자연스럽게 서윤의 왼쪽 손목, 소매 밑으로 살짝 드러난 붕대 자국을 시선으로 훑었는데, 붕대의 색이 이미 누렇게 변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갈아붙인 지 며칠은 지난 것이 분명했고, 그 순간 서윤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확인한 그는 속으로 확신했다.
'숨기고 있어. 상처도, 그보다 더 깊은 것도.'
하준은 부러 시선을 거두며 다른 병을 하나 더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건 심한 상처엔 잘 안 맞습니다. 손님이 지금 필요한 건 이쪽이겠죠."
그 말에 서윤이 고개를 들어 하준을 똑바로 마주보았고, 두 사람의 시선이 짧게 얽히는 동안 가게 안의 다른 두 사람도 잠시 고개를 돌려 이쪽을 살폈는데, 백은색 갑옷의 여자는 여전히 냉소를 머금은 채였고 후드를 쓴 여자는 그 순간에도 시선을 들지 않았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 겁니까."
서윤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경계가 섞였고, 하준은 그 반응이야말로 자신이 원했던 것임을 알았기에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손님 눈빛을 보면 압니다. 아무도 안 믿는 눈이었으니까요."
그 말은 단순한 관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이 가게를 거쳐 간 수많은 상처 입은 이들의 눈을 봐 온 경험에서 우러나온 확신이었는데, 순간 가게 안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을 느낀 하준은, 자신이 던진 말이 예상보다 더 정확하게 그녀의 방어선을 찔렀다는 것을 직감했고, 서윤의 손끝이 포션 병을 쥔 채로 가늘게 떨리는 것을 목격하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 여자, 무너지기 직전이구나.'
그 짧은 순간, 하준의 머릿속으로 예전에 이 가게를 찾았던 또 다른 손님의 얼굴이 스치듯 떠올랐는데, 겉으로는 완벽하게 웃고 있으면서도 손끝은 쉬지 않고 떨었던 그 사람 역시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는 기억이었고, 그 기억이 지금 눈앞의 서윤과 겹쳐지는 것을 느끼며 하준은 저도 모르게 숨을 조금 삼켰다.
그리고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서윤이 아무 말 없이 병을 카운터 위에 거칠게 내려놓고는 몸을 돌려 가게를 나가버렸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가게 안을 뒤흔들었고, 뒤따르던 두 여자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쫓아 사라졌는데, 백은색 갑옷의 여자는 나가는 순간까지도 하준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던졌고, 후드를 쓴 여자만이 마지막으로 문턱을 넘기 전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하준을 바라보았으며, 그 짧은 시선 속에 담긴 것이 경계인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 하준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가게 안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고, 카운터 위에 놓인 포션 병만이 조명 아래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었는데, 하준은 그 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방금 자신이 던진 말이 얼마나 위험한 도박이었는지를 뒤늦게 깨달았고, 동시에 저 여자가 다시 이 가게로 돌아올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반드시, 다시 온다.'
그 예감이 맞아떨어질지, 아니면 자신의 섣부른 판단이 애꿎은 화를 자초한 것일 뿐인지, 하준으로서는 아직 알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