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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발이 걸려 넘어졌다. 젖은 흙바닥에 손바닥이 파묻혔다. 차가운 흙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감각이 선명했다. 이런 순간에도 감각은 왜 이렇게 생생한 걸까. 일어서려는데 오른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인지, 넘어지며 삔 것인지 구분할 정신도 없었다. 다리를 내려다볼 시간조차 사치였다.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숲의 나무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콰직, 콰직. 굵은 나무줄기가 그대로 밀려나는 소리. 저게 짐승 한 마리가 낼 수 있는 소리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서걱. 뭔가가 등을 스쳤다. 뜨거운 통증이 어깨에서 등까지 번졌다. 마치 누가 등에 불붙은 철사를 그은 것 같았다. 손을 짚어보니 축축했다. 만져보지 않아도 그게 피라는 걸 알았다. 냄새로도 알 수 있었다. 비린 쇠 냄새. 비명이 나오려는 걸 이 악물고 삼켰다. 소리를 내면 더 정확히 위치를 알려주는 것뿐이니까. 이 정도는 배웠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 하루 만에 배운 것 치고는 값비싼 수업료였다. 다시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멈추면 그 자리에서 끝이라는 걸 알았다. 몸이 무너지려는 걸 억지로 세웠다. 관절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지를 수 있는 건 나뿐이었고, 나는 지르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달렸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숫자를 세지 않으면 다리가 먼저 멈춰버릴 것 같아서, 머릿속으로 계속 걸음을 셌다. 숲의 지형이 조금씩 낮아지더니, 어느 순간 발밑이 급격히 꺾였다. 비탈이었다. 균형을 잃고 미끄러지듯 굴러 내려갔다. 방향도, 속도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대로 어디까지 떨어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답을 구할 여유는 없었다. 돌부리에 몸이 부딪혔다. 어깨, 무릎, 팔. 온몸이 아팠지만 굴러 떨어지는 걸 멈출 방법이 없었다. 팔을 뻗어 뭔가를 붙잡으려 했지만 손에 잡히는 건 다 미끄러운 흙뿐이었다. 나뭇잎이, 진흙이, 작은 돌들이 옷 속으로, 상처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침내 멈춘 곳은 좁은 바위틈이었다. 작은 동굴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그냥 바위와 바위 사이의 틈. 몸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어깨가 걸려서 한 번에 들어가지 않았다.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상관없었다. 지금 살아있는 것보다 중요한 옷은 없었다. 밖에서 그 짐승의 발소리가 들렸다. 무겁게, 천천히. 바위틈 앞을 지나가는 소리. 쿵, 쿵. 땅이 울리는 게 등을 통해 느껴졌다. 저 정도 무게라면 사람 몸 하나쯤은 발밑에 두는 것도 모르고 지나갈 것 같았다. 숨을 죽였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썼다. 코로 들이마시는 숨마저도 조심스러웠다. 폐가 답답해지는 게 느껴졌지만 참았다. 참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짐승이 멈췄다. 그르렁거림이 바위틈 바로 앞에서 울렸다. 냄새를 맡고 있는 것 같았다. 킁킁, 하는 소리가 바위 틈새를 타고 들어왔다. 그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릴 수 있다는 게 무서웠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여기서 끝인가.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이름조차 제대로 불려본 적 없이. 문득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런 순간에까지 자조적인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뒤틀린 인간인가 보다. 하지만 짐승은 바위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덩치가 너무 커서 들어올 수 없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다가,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안도감이 밀려오는 것과 동시에 온몸의 힘이 빠졌다. 긴장이 풀리는 순간 그동안 억눌러둔 통증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등의 상처가 본격적으로 아파오기 시작했다. 피가 계속 흐르는 게 느껴졌다. 등을 타고 흘러내려 바위 바닥에 떨어지는 그 감각이 소름 끼치게 선명했다. 톡, 톡.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손으로 상처를 눌러봤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압박이라도 하면 좀 나을까 싶었는데, 손에 힘을 줄수록 통증만 더 커졌다. 지혈이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드라마에서는 옷을 찢어 묶기만 하면 다 끝나던데. 이 상태로 밤을 넘길 수 있을까. 질문을 던져놓고도 답이 없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다. 바위틈은 좁아서 몸을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무릎을 가슴께로 끌어당기고 최대한 몸을 작게 말았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체온이 덜 빠질까 싶어서였다. 체온이 조금씩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입김조차 하얗게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지만, 몸이 그걸 느끼고 있었다. 손끝이 먼저 감각을 잃어갔다. 발가락은 이미 저릴 지경이었다. 배고픔과 통증, 추위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세 가지가 번갈아 몸을 흔드는 것 같았다. 배 속이 텅 빈 채로 쥐어짜지는 느낌, 등에서 계속되는 화끈거림, 그리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 의식이 조금씩 흐려지는 게 느껴졌다. 머릿속에 뜬 생각들이 자꾸 흩어졌다. 방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이렇게 죽는 걸까. 이름도, 쓸모도 증명하지 못한 채. 이곳에 떨어진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로 사라지는 건가. 억울하다는 감정마저 무뎌질 만큼 몸이 지쳐 있었다. 눈이 자꾸 감겼다. 감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눈꺼풀이 무거웠다. 눈을 뜨려고 안면에 힘을 줘봤지만 그 힘조차 오래가지 않았다. 어디선가, 아주 먼 곳에서 낯익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화면 속 손가락이 뭔가를 누르는 소리. 작은 상자가 문 앞에 놓이는 소리. 익숙한, 그러나 이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예전에 살던 집, 현관문 앞에 배달 상자가 놓이던 그 소리와 똑같았다. 왜 지금 그게 들리는 거지.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의식의 경계가 자꾸 무너졌다. 여기가 바위틈인지, 예전의 그 방인지도 헛갈릴 지경이었다. 의식이 완전히 가라앉기 직전, 바위틈 밖에서 다시 그 짐승의 그르렁거림이 들려온 것 같았다. 돌아온 걸까. 아니면 착각인 걸까. 확인할 여력조차 없었다.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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