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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던전 중간 지점을 향해 가는 길은 점점 더 험해졌다. 바닥은 얼음처럼 미끄러웠고, 벽에서는 이상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콧속이 얼얼했다. 꼭 한겨울에 편의점 냉동고 문을 열어놓고 그 안에서 라면을 먹는 기분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해.” 리더님이 손을 들어 일행을 멈춰 세웠다. “던전 중간 지점은 원래 함정이 많은 구간이거든. 특히 좁은 통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함정이라고 해봤자 뭐, 바닥이 훅 꺼지거나 화살 몇 개 날아오는 정도겠지. 1년 동안 이 세계에서 구르면서 나름 감이 생겼다고 자만하고 있었다. 그 자만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는,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됐다. 좁은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서 희미하게 붉은 빛이 반짝였다. [마법 함정이 감지되었습니다.] 아, 시스템 메시지까지 뜨는 친절한 던전이었네. 근데 알려줘도 이미 늦은 것 같은데. 촤르르르륵! 천장에서 날카로운 쇠말뚝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게임 속 스테이지 함정처럼, 위에서 아래로 수십 개의 창살이 동시에 떨어지는 그림이었다. “조심해!” 리더님이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몸이 반응할 틈도 없었다. 쇠말뚝 하나가 그대로 내 등을 관통했다. 푹! 순간 시야가 새하얘졌다. 숨이 턱 막혔다. 아, 이거 죽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아팠다. 말로 표현하자면, 누가 내 등에 뜨겁게 달군 쇠꼬챙이를 박아놓고 그 위에서 얼음물을 쏟아붓는 느낌이었다. 뜨거운데 차갑고, 차가운데 뜨거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통증의 조합. 몸이 이런 것도 느낄 수 있구나, 싶었다. 쓸데없이 감동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쇠말뚝은 등을 관통해 그대로 바닥에 나를 고정시켰다. 나는 그 자세로 무릎이 꺾이며 쓰러졌다. 피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서준아!” 윤서아 성녀님이 처음으로 다급한 목소리를 냈다. 평소 우아하고 차분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이렇게 갈라질 수도 있구나, 나는 죽어가면서도 이상하게 그 사실이 신기했다. 리더님이 재빨리 달려와 쇠말뚝을 뽑았다. “으윽!” 뽑히는 순간 또 한 번 눈앞이 번쩍했다.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바닥이 순식간에 붉게 젖었다. 누가 케첩통을 통째로 쏟은 것 같은 그 광경을, 나는 남의 일처럼 멀거니 바라봤다. [욥기 3:24, 나의 탄식이 밥 먹듯 나오고] 탄식할 여유도 없었다. 그냥 아팠다. 엄청, 엄청, 엄청 아팠다. 말이라는 게 이럴 때 참 무력하다. 아프다는 말 말고는 그 순간을 설명할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치유 마법!” 리더님이 소리쳤고, 윤서아 성녀님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 끝에서 부드러운 빛이 뿜어져 나와 내 몸을 감쌌다. 따뜻했다. 꼭 겨울날 이불 속에 들어가는 느낌. 하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서 효과가 더뎠다. 빛이 상처 주변을 맴돌면서 조금씩 스며들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느낌이랄까. 피는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의식이 점점 희미해졌다. 강도현 형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야, 정신 놓지 마! 눈 감으면 안 돼!” 평소엔 나한테 짜증만 부리던 형이었는데, 지금은 그 목소리에 다급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의외였다. 이 사람도 나를 걱정하긴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피가 멈추기 시작했다. 아니, 그냥 멈춘 게 아니라, 상처 가장자리부터 살이 스스로 차오르고 있었다. 스르륵. 마치 되감기 영상을 보는 것처럼, 찢어진 살이 다시 붙고 뼈가 맞춰지고 있었다. 누가 편집 프로그램으로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 같았다. 아니, 이건 뭐 어벤져스에 나오는 재생 능력자도 아니고. “…뭐야, 이거.” 강도현 형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내려다봤다. 그 표정이 마치 배달 음식을 시켰는데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도착한 라이더를 보는 얼굴 같았다. 황당함과 놀람이 반쯤 섞인 그런 얼굴. 윤서아 성녀님도 지팡이를 든 채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지팡이 끝의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정민호 현자님이 안경을 고쳐 쓰며 가까이 다가왔다. “치유 마법 효과가 이상하게 증폭된 건가?”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평소 냉철하고 학구적인 분이었는데, 지금은 그 눈빛에 순수한 호기심 같은 게 섞여 있었다. 꼭 신기한 벌레를 발견한 생물학자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상처가 거의 다 아물어 있었다. 숨을 크게 몰아쉬며 눈을 떴다. “어… 저 살았나요?”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방금까지 죽음의 문턱에서 왔다 갔다 했는데, 몸을 일으켜보니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등이 좀 뻐근한 정도? 헌혈 좀 많이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살았지, 근데 너 상처 회복하는 게 좀 이상하다.” 리더님이 신중한 표정으로 내 등을 살폈다. 손끝으로 등을 더듬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그러니까, 원래 이 정도로 빠르진 않은데.” 그는 말끝을 흐리며 나와 윤서아 성녀님을 번갈아 봤다. [전도서 9:11, 빨리 달리는 자들이라고 선착순이 되는 것이 아니며] 선착순으로 상처가 낫는 거라면 나는 늘 일등이었나 보다, 하는 생각이 스쳤다. 어디 상처 회복 대회 같은 게 있으면 나가서 상금이라도 받아야 하나. 쓸데없는 생각이었지만, 그 생각을 하는 동안만큼은 방금 겪은 통증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원래 좀 튼튼한 편이에요. 마을에 있을 때도 웬만한 상처는 금방 나았어요.” 나는 애써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사실 진심이었다. 1년 넘게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이게 이상한 건지도 잘 몰랐다. 넘어져서 무릎이 깨져도 하루 자면 낫고, 손을 베어도 다음 날이면 흉터도 안 남았다. 그냥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리더님이 잠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뭔가 스치는 게 있었는데,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꼭 뭔가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으려는 그런 눈빛이었달까. “그래, 다행이다. 계속 가자.” 리더님은 곧 평소처럼 웃으며 대열을 정비했다. 그 웃음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뭔가 억지로 눌러 담은 것 같은 웃음. 하지만 나는 뒤통수가 찌릿한 느낌을 받았다. 뭐지, 뭔가 관찰당하는 느낌. 돌아보니 정민호 현자님이 뒤에서 조용히 뭔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작은 마법 수정구에 문자가 새겨지는 게 보였다. 손끝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수정구 표면을 스치며 빛나는 문자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관측 기록: 대상 개체, 상처 재생 속도 이상. 추가 관찰 필요.] 뭐지, 저건? 나는 궁금했지만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괜히 캐물으면 실례일 것 같았다. 1년 동안 몸에 새긴 예의범절이 여기서 발동했다. 남의 수첩 훔쳐보는 것도 아니고, 저게 내 이야기라는 것을 눈치채면서도 못 본 척하는 게 최선이었다. 일행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나는 발걸음을 옮기며 등의 상처 자리를 만져봤다. 흉터도 남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매끈했다.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훑어봐도 상처가 있었다는 흔적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시편 103:5, 네 청춘을 새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독수리는 몰라도, 내 등짝은 확실히 새것 같았다. 어디 중고나라에 내놔도 무흠집 신품이라고 우길 수 있을 정도였다. 좋은 건가? 분명 좋은 거겠지, 안 아프고 안 죽었으니까. 하지만 뭔가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강도현 형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도 평소와 조금 달랐다. 예전엔 짜증이었는데, 지금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꼭 처음 보는 신제품 스마트폰을 만지듯, 신기하면서도 조심스러운 그런 눈빛. “괜찮냐?” 형이 불쑥 물었다. “네, 괜찮아요.” “…그래.” 형은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그 짧은 대화 사이에 뭔가 묘한 침묵이 끼어들었다. 윤서아 성녀님도 걸음을 옮기며 자꾸 나를 힐끔거렸다. 평소엔 그런 시선을 보내는 분이 아니었는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삼키고 있는 얼굴이었다. 일행은 다시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통로가 점점 넓어지고, 공기 중에 떠도는 냉기가 더 짙어졌다. 발밑에서 서걱거리는 얼음 조각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낮고 무거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르르...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췄다. 뭐지, 저 소리는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몬스터의 울음과도 달랐다.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뭔가 거대한 것이 숨을 쉬는 소리 같았다. 리더님도 걸음을 멈췄다. 그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평소 웬만한 상황에도 여유를 잃지 않던 사람인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여유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 소리, 설마.” 리더님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 뒷말은 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통로 저편, 어둠이 짙게 깔린 그 안쪽에서, 뭔가가 천천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발소리 같기도 하고, 심장이 뛰는 소리 같기도 한 그 진동이 발밑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나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끼며 어둠 속을 응시했다. 저 안에 뭐가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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