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출발 전날, 나는 창고 뒤편에서 배낭을 정리하고 있었다.
장비라고 해봐야 남들이 쓰다 버린 낡은 방어구와 이빨 빠진 단검 한 자루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내겐 소중했다.
남들 눈에는 중고나라 최저가 매물 같아 보이겠지만, 나한테는 어엿한 풀세트 장비였다.
촤르르르륵!
낡은 사슬 갑옷을 걸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녹슨 부위가 손끝을 찔러 살짝 피가 났지만, 별거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이런 걸로 죽지 않는다.
【무한재생】덕분에 웬만한 상처는 하루 이틀이면 저절로 아문다.
좋은 스킬인지 나쁜 스킬인지는 잘 모르겠다.
효과가 딱 그 정도라서, 아무도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나조차도 그냥 “몸이 좀 튼튼한가 보다” 정도로 생각했으니까.
가끔은 이 스킬이 좀 억울하기도 했다.
남들은 【검성의 기운】이니 【불멸의 화염】이니 하는 번쩍번쩍한 이름을 달고 다니는데, 나는 그냥 상처가 좀 빨리 낫는다.
편의점 밴드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효율.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사슬 갑옷의 매듭을 마저 조였다.
짐을 다 챙긴 뒤 물자 창고로 향했다.
포션 상자를 옮기는데, 창고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문이 살짝 열려 있어서 안이 훤히 보였다.
강도현 형과 정민호 현자님이었다.
“이번에도 그 짐덩이를 왜 데려가는 겁니까.”
강도현 형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했다.
평소에도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유난했다.
“짐덩이라니, 그래도 던전 초입 몸빵으로는 딱이잖아.”
정민호 현자님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마법서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사각사각 섞여 들렸다.
그 태연한 말투가 오히려 더 신경을 긁었다.
“솔직히 지겹습니다. 매번 그놈 뒤치다꺼리하는 것도.”
“어차피 오래 안 갈 거야. 리더님 계획대로만 되면.”
계획?
무슨 계획을 말하는 거지?
나는 상자를 든 채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포션 병들이 상자 안에서 달그락, 달그락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숨을 죽이는데도 심장 소리가 그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계획이라니, 뭐 특별한 거라도.”
정민호 현자님이 다시 입을 열려던 그 순간,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구 있나?”
나는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상자를 든 채로 반쯤 뛰다시피 하는데도 다행히 그리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방금 들은 말이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뭐지 이 느낌은?
분명 짜증은 짜증인데, 그 안에 숨은 어떤 계산이 있는 것 같은 느낌.
마치 임대차 계약서 특약사항에 몰래 숨겨둔 조항 같은, 그런 께름칙함.
[욥기 6:14, 낙심한 자를 대하는 것이 그 벗의 도리이거늘]
낙심한 자를 대하는 도리라는 게 뒤에서 짐덩이 소리 하는 거였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아니야, 강도현 형이 원래 좀 무뚝뚝한 사람이잖아.
말투가 거친 거지 속마음은 다를 거라고, 나는 스스로를 애써 다독였다.
1년 동안 함께 지내며 나는 나름대로 강도현 형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다.
무뚝뚝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다, 라고.
표현이 거칠 뿐이지 그날 내가 넘어졌을 때 손을 내밀어준 것도 그 사람이었으니까.
뭐 그때 손을 내밀면서 “빨리 좀 일어나라”고 짜증을 냈긴 했지만.
겉으로는 츤데레, 속으로는 그냥 데레인 타입이라고 나 혼자 정의를 내려버린 것도 그날부터였다.
짐덩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긴 했다.
하지만 나는 애써 그 감정을 저 아래로 밀어 넣었다.
오늘은 인생 최초로 인정받은 기념일이니까.
안 좋은 생각으로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포션 상자를 마차에 실어 넣으면서도 자꾸 아까 그 대화가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계획대로만 되면, 이라니.
무슨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 대본 같은 소리를.
설마 나를 던전 초입에 미끄럼틀처럼 깔아놓고 자기들만 쓱 지나갈 계획이라도 있는 건가.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막장 드라마 전개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생각을 서둘러 접었다.
밤이 깊어지고, 나는 좁은 숙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내일이면 진짜 실전이다.
지금까지는 매번 대열 맨 끝에서 짐이나 나르고, 포션이나 배급하고, 가끔 몬스터 시선을 끄는 미끼 역할이나 하던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리더님이 직접 나를 지목해서 이번 【칠흑 심연】 공략에 데려간다고 했으니까.
“서준아, 이번엔 너도 같이 가자.”
그 한마디가 얼마나 벅찼는지, 아마 아무도 모를 거다.
마을이 사라진 뒤로 나는 늘 어딘가에 속하지 못한 채 겉돌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부족하고 실력도 없는 나를 이번엔 정식으로 데려간다고 했다.
그게 뭐라고, 나는 밤새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뒤척였다.
출발 당일 아침, 던전 앞에 모두가 집결했다.
【칠흑 심연】의 입구는 소문대로 압도적이었다.
거대한 검은 균열이 하늘을 향해 벌어져 있었고, 그 안쪽에서 서늘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마치 대형 냉동창고 문을 열어놓은 것 같은, 그런데 그 창고 안에 뭔가 살아 움직이는 게 있을 것 같은 느낌.
“다들 준비됐나?”
리더님이 앞장서서 물었다.
“네!”
다들 힘차게 대답했고, 나도 그 속에 섞여 목소리를 높였다.
윤서아 성녀님만이 나를 슬쩍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뭐지, 왜 저러시지?
평소엔 나한테 별 관심도 없으셨는데, 오늘은 유독 시선이 따가웠다.
하지만 그냥 컨디션이 안 좋으신가 보다 하고 넘겼다.
성녀님도 사람인데 아침엔 다 컨디션이 안 좋을 수 있는 거잖아.
입구를 통과하는 순간 세상이 뒤바뀌었다.
어둠 속에 붉은 빛이 점점이 떠 있는 기괴한 공간이 펼쳐졌다.
습하고 무거운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 안쪽이 까끌까끌했다.
[요나서 2: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느꼈을 기분이 딱 이런 걸까.
다만 나는 물고기 배 속이 아니라 최고급 지옥 테마파크 입구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입장료도 안 냈는데 이렇게 풀서비스로 공기부터 압박을 주다니, 서비스 정신이 아주 투철하시다.
“짐 배치는 서준이 맡아.”
리더님이 지시했다.
나는 재빨리 짐꾸러미를 정리하며 대열의 맨 끝에 섰다.
원래 있던 자리였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실전에 함께한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짐꾸러미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지만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무게가, 내가 이 팀의 일원이라는 증명서 같았다.
남들은 이런 걸 몸빵이니 짐덩이니 부른다지만, 나한테는 그게 곧 존재 증명이었다.
강도현 형이 앞장서서 검을 뽑아 들었고, 정민호 현자님은 마법서를 펼쳤다.
검날이 붉은 빛을 받아 스산하게 번뜩였다.
마법서의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며 알 수 없는 문양들이 빛을 냈다.
윤서아 성녀님은 성스러운 지팡이를 든 채 뒤에서 대기했다.
지팡이 끝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빛만이 이 어두운 공간에서 유일하게 온기 있는 것처럼 보였다.
리더님이 마지막으로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긴장하지 말고, 우리만 믿고 따라오면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 나에게 그 단어는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도 소중한 것이었다.
마을이 사라진 뒤로 유일하게 남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만 있으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행렬이 서서히 어둠 속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발밑에서 뭔가 물컹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어차피 이 던전 안에서 정상적인 바닥을 밟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 적도 없다.
습기 찬 공기가 볼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소름이 돋았지만, 그것도 그냥 던전 특유의 에어컨 서비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둠 속 저 멀리서, 뭔가 커다란 그림자가 스멀스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는 그 순간, 왠지 모르게 발끝이 저려오는 걸 느꼈다.
저건 그냥 지형 착시겠지.
설마, 저 안쪽에 뭔가가 진짜로 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림자는 분명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