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까망아, 드래곤이었어?

5화

결국 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펜을 쥔 손이 떨렸던가. 아니, 사실은 떨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담담했다. 인생 최대의 결정을 내리는 순간인데 손끝이 이렇게 태연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낯설었다. 따지고 보면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F등급 마물사 혼자 이 세계에서 살아갈 방법도 없었고, 눈앞에 있는 게 죽은 반려견이 전생한 존재라면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계약서 맨 아래 칸, 서명란에 이름 세 글자를 쓰는 데 걸린 시간은 채 3초도 안 됐다. 인생 최대의 선택이 이렇게 순식간에 끝나는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서명 직후 눈부신 빛이 잠깐 방 안을 채웠다가 사라졌다.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이었는데, 정작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냥 하얗기만 했다. 신들 사이의 이동 방식이 이런 건가, 하고 멍하게 생각하는 사이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작은 마을 외곽, 오두막 같은 집 앞에 서 있었다. 발밑은 흙바닥이었고, 코끝으로 스며드는 공기는 방금 전 홀에서 맡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풀 냄새, 젖은 나무 냄새, 그리고 멀리서 나는 연기 냄새. 살아있는 세계의 냄새였다. 까망은 거대한 드래곤 몸을 순식간에 줄여, 지금은 예전 그 개 크기 정도로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처음 그 변화를 목격했을 때 나는 진심으로 뒤로 넘어질 뻔했다. 방금까지 산더미만 한 존재가 눈 깜짝할 사이에 무릎 높이로 줄어드는 걸 보고 태연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나. "이것도 되는 거였어?" [몸 크기를 조절하는 건 기본이지. 그보다, 이 집이 우리가 살 곳이다.] "기본이면 진작 말을 해주지. 나 놀라서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 [네 심장은 원래 자리에 잘 붙어 있다. 확인해봐라.] 이런 실없는 농담을 태연하게 던지는 걸 보면 확실히 예전 까망은 아니었다. 예전 까망은 그저 꼬리를 흔들며 낑낑댈 뿐이었는데, 지금 이 녀석은 말빨로 나를 놀리기까지 한다. 집은 낡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벽은 흙과 나무를 섞어 만든 것 같았고, 지붕은 낮았지만 비가 새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 하나, 화로 하나,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텃밭이 있었다. 침대는 좁았지만 낡은 이불이 정갈하게 접혀 있었고, 화로 옆에는 장작이 이미 몇 단 쌓여 있었다. 누군가 미리 정리를 해둔 게 분명했다. 어딘가 익숙한 냄새가 났는데, 곧 이해했다. 개 냄새였다. "너 여기 미리 와본 거야?" [신들이 마련해준 거처다. 너를 찾는 동안 잠깐 머물렀지.] "그럼 이 장작도 네가 쌓아놓은 거야?" [불편함을 견디는 취미는 없으니까.] 드래곤이 장작을 패는 그림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세상 무서운 존재가 도끼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누가 상상이나 하겠나. 창을 다시 열어봤다. 계약 완료 이후 내 상태창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김도윤 / 24세 / 직업: 마물사 / 등급: F] [스킬: 마물 연결(수동) / 감응 감지(수동)] [보유 마물: 1 — 까망] 한참을 들여다봤다. 뭔가 대단한 게 생겼겠지, 하는 기대를 안고 있었는데 결과는 초라했다. 스탯 총합은 여전히 12였다. 등급도 그대로 F. 유일하게 바뀐 게 저 스킬 두 개인데, 뭘 하는지도 잘 몰랐다. 이름만 봐도 대충 짐작은 갔지만, 정작 눌러도 상세 설명이 뜨지 않았다. "나 스탯은 그대론데. 너 강해도 나는 여전히 약하네." [당연하지. 계약자와 마물의 능력은 별개다. 너는 지금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일 뿐, 네 몸이 강해지는 건 아니다.] "그럼 뭐야, 나 그냥 짐짝인 거야?" [누가 네 다리에 매달려서 낑낑거렸는지 기억하지 않느냐.] 순간 말이 막혔다. 그러네, 처지가 완전히 뒤바뀐 거였다. 예전엔 내가 까망을 돌봤는데, 지금은 까망이 나를 돌보는 쪽이 됐다. 사료를 챙겨주던 손이, 이제는 오히려 뭔가를 받아야 하는 손이 된 셈이었다. "그래도 억울하잖아. 나도 뭔가 강해지는 맛이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 맛은 내가 대신 느껴주마. 너는 옆에서 구경만 하거라.] "이거 완전 착취 아니냐. 나는 계약자인데 왜 구경만 해." [불만이면 계약서를 다시 써 오거라. 신들의 사무실이 여기서 얼마나 먼지는 모르겠지만.] 말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어딘가 부끄럽고, 또 어딘가 위로가 됐다. 강해진 게 내가 아니라 저 녀석이라는 사실이 서운하면서도, 동시에 저 녀석이 내 편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든든했다. 화로에 불을 붙였다. 부싯돌 비슷한 도구가 화로 옆에 놓여 있었는데, 서너 번 손을 놀리자 불이 붙었다. 이 세계에서도 라이터 하나만 있으면 편할 텐데,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사소한 걸로도 그리워지는 게 원래 세계의 물건들이었다. 그날 밤, 화로 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 외진 마을에 나를 찾아올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밤이 깊었고, 창밖은 이미 새 한 마리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까망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귀가 쫑긋 서고,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 반응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손님이라는 걸 짐작했다. 문을 열자 처음 보는 형체가 서 있었다. 사람이라기보단 빛으로 이루어진 실루엣이었다. 윤곽은 사람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안쪽은 흐릿한 빛의 입자들이 계속 움직이며 뭉쳐지고 흩어지길 반복했다.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데도 눈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세요?" [나는 한울이다. 이 세계의 수호신 중 하나지.] 수호신. 홀에서 들었던 그 수많은 목소리 중 하나가 이렇게 문 앞에 서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났다. 신이라면 좀 더 거창하게 등장할 줄 알았는데, 그냥 문을 두드리고 서 있는 모습이 오히려 김이 빠졌다. 까망이 즉시 몸을 낮추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낮은 으르렁거림이 목구멍에서 새어 나왔는데, 그 소리만으로도 방 안 공기가 팽팽해지는 게 느껴졌다. [적의는 없다. 오히려 경고하러 왔다.] "경고요?" 심장이 조금 빨리 뛰기 시작했다. 신이 밤중에 직접 찾아와서 경고를 한다는 건, 절대 좋은 소식일 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한울이라는 존재는 잠시 방 안을 둘러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시선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데도, 이상하게 그 존재가 방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들 사이에서 소환자 정책에 대해 논쟁이 있다.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지 않기로 한 결정은, 처음부터 모두가 동의한 게 아니었다.] 그 말에 나는 아까 홀에서 봤던 목소리들이 다시 떠올랐다. 결원이라는 단어, 그리고 은폐 의무라는 조항.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나를 두고 벌어진 논쟁이었던 모양이었다. "저희를 안 돌려보내는 이유가 뭔데요?" [이 세계의 마물 개체 수가 급감하고 있다. 소환자들의 힘을 빌려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지. 그리고 너처럼 특별한 계약을 맺은 이는… 더 주목받을 것이다.] 특별한 계약. 그 말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남들과 다르게 특별하다는 게 이 세계에서는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위험 신호라는 걸, 나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특별하다는 게 좋은 뜻은 아닌 거 같은데요." [네 짐작이 맞다.] 이렇게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다. 차라리 애매하게 넘어가 주면 좋았을 텐데, 확답을 들으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네 마물의 존재를 다른 신들이 알게 되면, 너는 편히 살 수 없을 것이다. 저것은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등급의 존재니까.] 까망이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한울은 그 반응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니, 표정이라고 할 게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반응이라 부를 만한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가장 위험한 등급이라니, 구체적으로 어느 정돈데요?" [네가 알 필요는 없다.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정보니까.] "그렇게 말하면 더 궁금해지잖아요." [그럼 궁금한 채로 지내거라. 그게 지금 네게 가장 안전한 상태다.] 말문이 막혔다. 신이라는 존재는 이렇게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 재주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조용히 지내라. 힘을 숨기고, 눈에 띄지 마라. 나는 너희를 도울 수 있는 만큼 도울 것이나, 그 이상은 기대하지 말거라.] "그 정도면 어느 정돈데요? 밥은 챙겨주시나요, 아니면 진짜 말로만 돕는 거예요?" [너는 지금 신을 상대로 흥정을 하려는 것이냐.] "흥정 아니고 확인이요. 확인." […필요한 최소한의 것은 지원하겠다. 그 이상은 스스로 해결하거라.] 의외로 대답을 해주는 걸 보니, 이 신도 나름대로 참아주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냥 빨리 대화를 끝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고. 그 말을 끝으로 한울의 형체가 서서히 흐려졌다. 빛의 입자들이 점점 옅어지다가, 마지막엔 방 안 공기에 완전히 녹아들듯 사라졌다. 나는 닫힌 문을 한참 바라봤다. 문은 애초에 열린 적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닫혀 있었다. 조용히 지내라니. 방금 F등급 마물사한테 측정 불가 등급 드래곤이 붙었는데, 이걸 어떻게 조용히 넘기라는 건지. 세상에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요구가 또 있을까 싶었다. 눈에 띄지 말라면서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존재를 붙여준 게 신들 본인들 아닌가. "까망, 너 방금 저 말 들었지." [들었다.] "우리 진짜 괜찮은 거야?" 대답이 없었다. 까망은 그저 창밖, 어두워진 마을 너머 어딘가를 오랫동안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이 고정된 방향에는 딱히 뭐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 눈빛만은 이상하게 진지했다. 마치 이미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나는 그 옆에 슬쩍 다가가 앉았다. 화로의 불씨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사그라지고 있었다. 방금까지 신이 서 있던 자리엔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왔다 갔다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존재가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까망아." [뭐냐.] "솔직히 말해줘.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까망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본 채 낮게 대답했다.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 있지.] "뭔데." [네가 혼자였다면 이미 끝났을 상황이라는 것.] 그 한마디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위로랍시고 하는 말인지, 그냥 사실을 말해준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아마 둘 다였을 거다. 화로의 불씨가 마지막으로 한 번 크게 일었다가 사그라졌다. 방 안이 순간 어두워졌고, 창밖 저 멀리 마을 어딘가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범한 소리였는데, 그 순간만큼은 유독 신경이 곤두섰다. 이 조용한 밤이, 얼마나 더 조용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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