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빛이 잦아들고 나서, 우리 앞에 반투명한 창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허공에 뜬 문서 같은 그것에는 이름, 나이, 그리고 낯선 단어들이 나열돼 있었다. 폰트도 아니고 손글씨도 아닌,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필체였다. 다른 소환자들은 저마다 감탄사를 터뜨렸다.
"검사? 우와, 나 검사 됐어!"
"전 마법사인데요, 이거 무슨 등급이에요?"
"저는 기사인데 SS등급이래요. SS면 좋은 거죠?"
여기저기서 창을 들여다보며 자기들끼리 등급을 비교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게임 카드를 뽑고 확률을 확인하는 사람들 같았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긴 했다.
주변이 시끌시끌해지는 사이 나는 내 앞에 뜬 창을 들여다봤다. 손이 살짝 떨렸다. 유골함을 안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김도윤 / 24세 / 직업: 마물사 / 등급: F]
F. 알파벳으로 등급을 매기는 세계에 온 것도 신선했지만, 그중에서도 F라니. 게임 좀 해본 사람이라면 F가 뭘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낙제. 최하. 바닥. 그 아래도 있으면 좋겠는데 없는 것 같았다.
혹시 오타 아닐까 싶어서 창을 몇 번이고 껐다 켜봤다. 창은 매번 똑같은 문구를 띄웠다. F는 F였다. 몇 번을 다시 봐도 F가 A로 바뀌는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기, 이거 F가 제일 낮은 거 맞죠?"
옆에 서 있던 정장 입은 남자한테 물었다. 그는 자기 창을 들여다보며 뭔가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넥타이도 삐뚤어진 채로 웃고 있는 걸 보니 상당히 좋은 결과가 나온 모양이었다.
"제 건 A인데요. 검사 A등급이라고 뜨네요."
말투에서부터 은근한 자랑이 묻어났다. 방금 전까지 야근하다 끌려온 사람 같던 얼굴이 갑자기 활짝 펴져 있었다.
"…아, 예. 축하드려요."
마음속에서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소리는 안 났다. 그냥 그런 느낌이었다. 건물이 철거되는 소리를 마음으로 재생한다고 해야 할까.
"근데 F는 진짜 처음 봐요. 저희 회사에도 등급 시스템 있는데 F는 없거든요, 밑으로 갈수록 좋은 거 아니에요?"
정장남이 순수한 얼굴로 물었다. 위로를 하려는 건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검사, 기사, 마법사, 궁수 같은 그럴싸한 직업들을 받았다. 등급도 대체로 D 이상이었다. 나만 F를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저 멀리서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저도 F인데요…" 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F가 흔한 것도 아니었다. 홀 안을 훑어봐도 F를 받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마물사가 뭐 하는 직업인지도 몰랐다. 이름만 보면 마물을 다루는 사람 같은데, 정작 내 창에는 다룰 만한 마물이 하나도 목록에 없었다. 조련사인데 조련할 게 없는 셈이었다. 낚싯대는 있는데 물고기가 없는 강태공이랄까.
[스킬: 없음]
[보유 마물: 0]
[스탯 총합: 12]
12. 한 자릿수를 갓 넘긴 숫자를 보면서 나는 잠깐 숨을 골랐다. 다른 사람들 스탯 총합이 대체로 세 자릿수로 시작하는 걸 보고 나는 조용히 창을 껐다. 안 봐도 될 뻔했다.
옆에서 누군가 자기 스탯을 보며 "힘 150이래! 이 정도면 상위권 아니냐?" 라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냥 내 창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비교는 사람을 병들게 한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각자에게 부여된 직업은 앞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갈 방식을 의미하느니라. 마을로 이동하여 정착을 도울 것이니, 순서대로 이름을 부르면 나오거라.]
목소리가 다시 울렸고, 사람들이 하나둘 이름이 불리는 순서에 따라 빛 속으로 사라졌다. 순서는 등급이 높은 사람부터인 것 같았다. A등급 정장남이 제일 먼저 불렸고, 그는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빛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치 승진 발표를 듣고 회의실로 걸어가는 사람 같은 뒷모습이었다.
나는 맨 뒤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유골함을 여전히 품에서 놓지 않은 채였다. 손끝이 시렸다. 홀 안 온도가 특별히 낮은 것도 아닌데 그랬다.
이름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홀 안의 인구가 줄어들었다. 남은 사람들의 표정도 점점 초조해졌다. 마치 대기실에서 순번을 기다리는데 앞사람들이 하나씩 좋은 소식을 듣고 나가는 걸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나만 계속 남아 있으면 어쩐지 안 좋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불길함이 스쳤다.
"저기요."
내 앞에 있던 여자가 목소리 나는 방향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을 걸었다. 나이는 나랑 비슷해 보였고, 잠옷 차림 그대로였다. 아마 자다가 그대로 끌려온 모양이었다. 슬리퍼 한쪽이 없는 걸 보니 더더욱 그랬다.
"저희 진짜 못 돌아가는 거예요?"
질문이 던져지자 홀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다들 이름이 불리기만을 기다리다가, 이 질문을 듣고서야 정작 궁금했던 걸 떠올린 표정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대답보다 더 많은 걸 말해줬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꾸나.]
목소리에서 뭔가 얼버무리는 느낌이 났다. 사람 목소리도 아닌데 그런 게 느껴진다는 게 신기했지만, 분명히 그랬다.
"아니, 지금 궁금한데요. 저 회사 내일 출근해야 되는데."
여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저 사람 참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나였으면 그냥 조용히 있었을 것이다.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침묵이 최선이라고 믿는 편이었다. 괜히 나섰다가 불리한 답이 나오면 그건 또 그거대로 골치 아프니까.
여자 옆에 있던 남자도 슬며시 거들었다.
"저도 궁금해요. 저희 부모님이 걱정하실 텐데."
[돌아가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존재하지 않느니라.]
순간 홀 안이 얼어붙었다. 누군가는 헛웃음을 지었고, 누군가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방금까지 A등급을 받았다며 웃던 사람들도 표정이 굳어 있었다. 등급이 높아도 집에 못 가는 건 똑같았다.
"뭐라고요?"
"존재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럼 저희는 여기서 평생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겹쳐 터졌다. 누군가는 울먹였고, 누군가는 욕을 뱉었다. 잠옷 차림 여자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방금까지 그렇게 당당하게 질문하던 사람이었는데.
질문이 쏟아졌지만 그 이후로는 대답이 없었다. 목소리는 침묵했고, 사람들 이름을 부르는 절차만 계속됐다. 마치 방금 벌어진 소동이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다음 이름이 담담하게 불렸다.
"이서연."
이름이 불리자 방금 질문했던 여자가, 아직 얼굴에 놀란 기색이 남은 채로 빛 속으로 사라졌다. 대답을 듣지 못한 사람이 그냥 그렇게 순서대로 사라지는 걸 지켜보는 게 이상하게 불편했다.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저렇게 중대한 정보를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흘리고 넘어간다는 게. 회사에서도 이런 식으로 나쁜 소식을 전달하면 인사팀이 아주 곤란해질 텐데, 이 목소리는 그런 걱정을 전혀 안 하는 눈치였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그 생각은 바로 취소해야 했다. 어차피 서울에 돌아가서 할 일도 밀린 월세를 갚는 것뿐이었으니까 — 라고 자조하려 했는데, 마음이 그렇게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밀린 월세, 반쯤 미뤄둔 대출 이자, 아직 정리 못 한 유품들. 그런 것들이 이제 다 의미 없는 목록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얹혀왔다. 돌아갈 곳이 사라졌다는 건, 돌아갈 이유였던 것들도 전부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것과,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그리고 목소리가 그 사실을 숨겼다는 것도, 명백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다들 흥분해서 자기 등급 확인하는 사이에 슬쩍 절차만 진행시키려 했던 게 분명했다. 누군가 물어보지 않았으면 아마 끝까지 말 안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품에 안은 유골함이 유독 무겁게 느껴진 건, 아마 착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김도윤."
내 이름이 불렸다. 맨 뒤에 서 있던 나만 남은 홀 안에서, 그 목소리가 유일하게 울렸다.
빛이 발밑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