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감정실 벽이 갈색빛으로 물들었다.
빛은 천천히 퍼졌다.
벽을 타고 흐르듯 번져나갔다.
바닥에 새겨진 문양이 은은하게 달아올랐다.
수정구가 그 빛을 빨아들이듯 반짝였다.
사제의 손이 떨렸다.
지팡이를 짚은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건…….”
말을 잇지 못했다.
늙은 사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수십 년 감정을 해온 그의 얼굴에도 낯선 빛깔이었다.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수정구 위에는 낯선 문자가 떠올라 있었다.
[속성 감정 완료]
[속성: 연금술]
[등급: 미상 — 표준 등급 체계로 산정 불가]
연금술.
시우는 그 단어를 곱씹었다.
화염도 아니고, 검기도 아니고, 신성도 아니고.
연금술이라니.
전생에도 이런 단어는 들어본 적 없었다.
그런데 하필 이 세계에서, 하필 자신에게.
“연금술이 뭔데요?”
물었다.
사제가 헛기침을 하며 겨우 표정을 수습했다.
지팡이를 고쳐 짚는 손끝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렸다.
“물질의 성질을 바꾸는 힘이다. 돌을 흙으로, 물을 얼음으로. 하지만…….”
“하지만요?”
“전투에는 거의 쓸모가 없다. 이런 속성을 가진 자는 대부분 학자나 장인이 되지.”
쓸모없는 힘.
마물이 들끓는 세상에서, 싸울 힘이 없는 속성.
시우의 표정이 굳었다.
전생에서도 하찮았고, 이번 생에서도 하찮은가.
이건 좀 억울한데.
“그러면 등급도 못 매기는 이유는요?”
사제가 미간을 좁혔다.
“기록이 부족해서 그렇다. 백 년에 한둘 나올까 말까 한 속성이니까.”
“그럼 저주받은 건 아니고요?”
“저주는 아니다. 다만…….”
사제가 말을 고르는 듯 잠시 멈췄다.
“쓸모를 찾기 어려운 것뿐이지.”
시우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백 년에 한둘. 그런데 쓸모는 없다.
귀하긴 한데 쓸데는 없다는 소리.
“다른 아이들은 뭘 받았어요?”
“대개 검기나 원소 계열이지. 강한 아이는 화염이나 뇌전을 받기도 한다.”
“그럼 저처럼 애매한 건 흔하지 않아요?”
“흔치 않다. 그래서 더 난처하지.”
사제의 목소리에는 곤란함이 배어 있었다.
부러움이 아니었다.
허탈함이었다.
남들보다 일찍 불려와서 받은 게, 하필 이런 애매한 속성이라니.
옆 마을에서 감정받은 아이가 화염 속성으로 벌써 마을의 자랑거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시우는 오는 길에 마차 안에서 들었었다.
그 아이는 이제 다섯 살인데 벌써 손끝에 불씨를 피운다고 했다.
자신은 이제 겨우 문자 하나를 받았을 뿐인데.
“나가보아라. 결과는 정식 문서로 남작가에 전달될 것이다.”
사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감정실을 나서는 시우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쿵.
밖에서 기다리던 태오가 다가왔다.
급한 걸음이었다.
“어떻게 됐어?”
“연금술이래요.”
짧게 답했다.
태오의 눈이 커졌다.
“연금술?”
“쓸모없는 거래요. 전투에는.”
순간 태오의 얼굴에 실망이 스칠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표정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연금술이라.”
턱을 만지며 중얼거리는 얼굴에 실망 대신 흥미가 떠올랐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마치 머릿속에서 뭔가를 빠르게 조립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요?”
“아니, 잠깐.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그게 다예요? 실망 안 해요?”
“실망? 왜 실망을 해.”
태오가 되물었다.
그 말투에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시우는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다.
보통은 검기나 원소 계열을 기대했을 텐데.
“사제님도 쓸모없다고 했는데요.”
“사제가 뭘 알아. 그 늙은이는 백 년 전 지식으로 감정만 하는 사람이야.”
태오가 코웃음을 쳤다.
발걸음을 서둘렀다.
마차로 향하는 길, 그의 눈빛은 계속 무언가를 계산하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차에 오르면서도 태오는 몇 번이나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뭔가를 셈하는 시늉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마차 안, 서아가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바퀴가 돌길을 지나며 덜컹거렸다.
“쓸모없는 거 아니야, 시우. 세상에 쓸모없는 힘은 없어.”
위로하는 말투였지만 시우는 담담했다.
“괜찮아요. 별로 신경 안 써요.”
거짓말이었다.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전생에서도 특별하지 못했던 자신이, 다시 태어나서까지 특별하지 못한가 하는 생각.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시우는 입을 다물었다.
서아는 그런 아들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태오만이 창밖을 보는 척하며 계속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서재에 불이 켜져 있었다.
태오가 낡은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표지에는 ‘연금술과 원소의 상호 반응’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책장은 이미 반쯤 넘어가 있었다.
군데군데 접힌 페이지 모서리가 눈에 띄었다.
“여보, 아직 안 자요?”
서아가 문틈으로 들여다봤다.
“이것 좀 봐.”
태오가 책의 한 구절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문장 위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서아가 그 문장을 읽어 내려가던 중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게…… 정말이에요?”
“기록에 따르면 그렇대. 연금술 계열이 원소 계열과 결합하면, 원소의 위력을 몇 배로 증폭시킬 수 있다는군.”
“몇 배나요?”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두 배. 어떤 경우엔 그 이상이라고도 적혀 있어.”
서아의 눈이 커졌다.
“그럼 시우가…….”
“내 화염과 결합할 수 있다면.”
태오의 눈빛이 뜨겁게 빛났다.
“쓸모없는 힘이 아니야. 오히려…….”
말끝을 흐렸다.
대신 그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결합이라는 게 정확히 어떻게 되는 거예요?”
서아가 물었다.
“그건 아직 정확히 안 나와 있어. 사례가 워낙 적어서.”
“그럼 확실한 게 아니잖아요.”
“확실한 게 아니어도.”
태오가 책장을 다시 넘겼다.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해.”
“여보.”
“이 책, 왕도 서점에서 구한 지 벌써 삼 년이 넘었어. 그때는 그냥 참고서적으로 산 거였는데.”
태오가 책등을 손끝으로 쓸었다.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지.”
방 밖에서, 시우는 그 대화를 몰래 엿들었다.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불빛이 복도 바닥에 가늘게 걸쳐 있었다.
증폭이라고?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쓸모없는 게 아니었다.
다만, 아직 아무도 그걸 몰랐을 뿐.
그리고 아버지는, 그걸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이었다.
시우는 발끝을 세운 채 조심스럽게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서도 한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연금술.
화염과의 결합.
증폭.
머릿속에서 그 세 단어가 계속 맞물려 돌아갔다.
전생에 이런 걸 알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아니, 그때는 이런 세계 자체가 없었으니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쓸모없다고 낙인찍힌 힘이, 실은 누군가와 맞물리면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아버지가 먼저 알아버렸다는 것.
시우는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 태오가 어떤 얼굴로 자신을 볼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