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추방됐더니 만능설계사라니

2화

"드디어, 열렸구나." 목소리는 종이 안쪽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니, 종이 자체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스케치북을 떨어뜨릴 뻔했다. 손끝이 저절로 오그라들었다. "누구야." 대답이 없었다. 문양은 그대로 빛나고 있었다. 붉은빛도 아니고 흰빛도 아닌, 이름 붙일 수 없는 색이었다. "도련님, 왜 그러세요." 다은이 내 팔을 잡았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거… 보여?" 나는 스케치북을 다은 쪽으로 내밀었다. 다은이 종이를 들여다봤다. 눈동자가 몇 번 움직였다. "그냥 종이인데요."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한테만 보인다는 뜻이었다.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지나갔다.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건 설계도야." "네가 원하는 걸 그리면, 이루어져." 짧고 단정적인 말투였다.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그냥 반말. 사람이 아닌 것과 대화하고 있다는 확신이 그 순간 들었다. "뭘 그리든?" 나는 다시 물었다. 전생에서 서른여섯 해를 살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이유 없이 뭔가를 준다고 하면, 그건 함정이었다. 투자든, 대출이든, 계약이든. "대가는." "글쎄." 목소리가 짧게 웃었다. 웃음소리도 종이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느낌이었다. "그건 나중에 알게 돼." 대답이 아니었다.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회피였다. 그런데 더 이상 캐물을 정신이 없었다. 마차 바깥에서 마부가 소리쳤다. "이대로 밤을 나면 다 죽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공포에 질린 목소리였다. 다은의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입술도 파랬다. 숨을 쉴 때마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전생의 습관이 다시 튀어나왔다. 정보가 부족하고 리스크가 큰 상황에서는,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선택지를 먼저 찾는 것. 그런데 지금은 선택지가 하나뿐이었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종이 위에 선을 그렸다. 전생에서 봤던 야외용 온열기. 캠핑용 화로, 그리고 단열재. 기억나는 대로, 아는 대로 그렸다. 정확한 설계도가 아니었다. 그냥 형태였다. 전기 회로 같은 건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손은 멈추지 않았다. 선이 완성되자 문양이 더 밝아졌다. 종이 전체가 빛을 뿜기 시작했다. "실행할까?" 목소리가 물었다. "어떻게 되는 건데." "보면 알아." 짜증이 났다. 그런데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전생에서도 그랬다. 아무리 불확실해도, 손절할 시점이 아니면 밀고 나가야 했다. "해." 순간, 눈앞에서 작은 빛들이 터졌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아니, 그보다 더 작은. 십 센티미터쯤 되는 사람 형상들이 종이 위에서 튀어나왔다. 다은이 숨을 삼켰다. "저게 뭐예요…" 목소리가 떨렸다. 겁에 질린 것 같았는데, 눈은 그것들을 놓치지 않고 좇고 있었다. 작은 사람들은 날개도 없었다. 동화 속 요정처럼 반짝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작은 사람이었다.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회색 작업복, 허리에 도구 벨트, 심지어 안전모까지 쓴 것도 있었다. 전생의 공사 현장이 떠올랐다. 투자했던 스타트업 중 하나가 물류창고를 지을 때 봤던 인부들. 그 축소판이 지금 눈앞에서 종이 위를 걷고 있었다. 하나가 나를 올려다봤다. 얼굴은 사람과 똑같았다. 다만 크기가 손가락 두 개 정도였다. "설계자님."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설계도 확인했습니다." "자재는 주변에서 조달합니다." "완성까지 예상 시간, 두 시간."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진짜 일어나는 일인지, 아니면 얼어 죽어가는 내 뇌가 만든 환각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자재는 어디서." 겨우 물었다. 작은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다른 작은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작은 사람들은 곧바로 흩어졌다. 마차 바깥 눈 속으로 뛰어들었다. 일사불란했다. 망설임이 없었다. 숫자를 세어보니 스무 명쯤 되는 것 같았다. 저마다 다른 도구를 들고,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도련님." 다은이 내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얼어 있었다. "저는 도련님 믿어요." 근거 없는 말이었다. 증거가 하나도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에 뭔가가 움직였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었다. 가슴 어딘가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는데,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다. 몸과 마음이 따로 반응하는 느낌이었다. "뭘 만드는지도 몰라."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다은이 웃었다. 입술이 파란데도, 웃는 얼굴은 여전했다. "안 죽으면 되죠." 그 말이 웃겼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나는 웃었다. 전생에서도 이런 순간이 있었을까. 계좌가 반토막 나고, 다음 날 상장폐지 공시가 뜨기 직전, 그 아슬아슬한 순간에도 누군가 옆에서 웃어준 적이 있었나. 없었다. 그때는 혼자였다. 지금은 아니었다. 마차 바깥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창문 틈으로 새어드는 바람이 점점 매서워졌다. 마부가 몇 번이나 마차 문을 두드리며 상태를 확인했다. "안에 다들 괜찮으십니까!" "버티고 있어요!" 내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추위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밤 9시.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망치질 소리, 나사 돌리는 소리. 사람의 것이라기엔 너무 빠르고 정교했다. 나는 마차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눈발이 얼굴에 닿는 순간마다 따끔거렸다. 작은 사람들이 눈밭 위에서 뭔가를 짜맞추고 있었다. 금속 같은 자재를 눈 속에서 뽑아내는 건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가져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한 무리는 나무를 베어 오고 있었다. 다른 무리는 그 나무를 얇게 쪼개서 뭔가의 틀을 짜고 있었다. 또 다른 무리는 이해할 수 없는 손동작으로 눈 자체를 만지고 있었다. 눈이 녹는 것도 아니고, 얼어붙는 것도 아니었다. 형태가 변하고 있었다. "저게 대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작업 소리가 멈췄다. 조용해졌다. 너무 조용했다. 바람 소리마저 잠깐 멎은 것 같았다. 두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나는 손목을 확인했다. 시계는 없었다. 그런데 몸이 알고 있었다. 정확히 두 시간이 흘렀다는 걸.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차 안 온도는 그대로였다. 다은의 입술은 여전히 파랬다. 그녀의 어깨는 계속 떨리고 있었다. 완성이라고 했는데. 실패한 건가. 전생의 습관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투자한 프로젝트가 예상 시점을 넘겨도 아무 반응이 없을 때, 그건 대부분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지연이거나, 실패거나. 가슴이 다시 조여왔다. 이번에도 손절인가. 또 잘못된 선택을 한 건가. 다은을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믿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등 뒤에서 갑자기 온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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