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악몽에서만 사기캐

5화

다음 날 아침, 교문 앞이었다.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공기가 축축했다. 발밑에서 흙냄새가 올라왔다. 야. 누군가 태오의 앞을 막아섰다. 금발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 서하린이었다. 교복 재킷을 걸치지 않고 셔츠 소매를 접어 올린 채였다. 팔뚝에 얇은 흉터가 몇 개 보였다. 뭔데요. 태오가 물었다. 어제 그거 뭐냐. 서하린이 팔짱을 꼈다. 뭐가요. 의자 부순 거. 그냥 힘 좀 썼어요. 태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서하린의 눈이 반짝였다. 먹잇감을 본 눈빛이었다. 한 번 해보자. 네? 싸워보자고. 서하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주변에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싸움 구경이라면 흑련학원 학생들은 언제나 반가운 손님이었다. 누군가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누군가는 자리를 잡으려 앞으로 밀고 나왔다. 돈 걸어. 뒤에서 누군가 낮게 속삭였다. 서하린 쪽에 만 원. 태오는 그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내 목숨값이 만 원이냐. 왜 그래야 되죠. 태오가 되물었다. 이유 없어. 그냥 궁금해서. 궁금하다는 이유로 사람 패는 건 어디서 배운 거지. 태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겉으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서하린이 먼저 움직였다. 주먹이 빠르게 날아왔다. 태오는 몸을 틀었다. 주먹이 어깨를 스쳤다. 바람이 옷깃을 흔들었다. 생각보다 빠르네. 태오가 중얼거렸다. 서하린의 몸에서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눈빛이 흐려졌다. [전투광] 전투가 지속될수록 신체 능력이 상승하나 이성 제어가 어려워짐. 통찰이 그녀의 상태를 읽어냈다. 위험한 스킬이네. 태오는 눈매를 좁혔다.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는 상대라면 빨리 끝내는 게 답이다. 질질 끌수록 손해 보는 쪽은 자기다. 서하린의 두 번째 공격이 더 빨라졌다. 태오는 뒤로 물러섰다. 발끝이 땅을 딱딱하게 밀었다. 주먹이 얼굴 바로 앞을 지났다. 바람이 볼을 스쳤다. 가깝다. 너무 가깝다. 서하린의 발이 다시 움직였다. 낮게 파고드는 각도였다. 태오는 반사적으로 무게 중심을 낮췄다. 세 번째 공격. 이번엔 주먹이 아니라 팔꿈치였다. 태오는 반격했다. 손목을 붙잡고 몸을 틀었다. 서하린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털썩. 서하린이 바닥에 무릎을 짚었다. 숨을 몰아쉬었다. 주변에서 탄성이 터졌다. 와, 하는 소리와 미친, 하는 소리가 동시에 섞여 나왔다. 스마트폰을 들었던 학생 몇이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서하린이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분한 게 아니라, 재밌다는 얼굴이었다. 숨이 거칠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한 번 더. 됐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태오가 손을 털었다. 한 번 더라니. 아침부터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서하린이 천천히 일어섰다. 숨은 아직도 거칠었다. 소매로 입가를 훔쳤다. 너, 이름이 뭐야. 강태오요. 서하린. 기억해둬. 짧은 인사였다. 서하린은 그 말만 남기고 몸을 돌렸다. 걸음걸이가 처음보다 조금 느려져 있었다. 그래도 등은 꼿꼿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무리가 흩어졌다. 누군가는 이겼다는 쪽에 아쉬운 소리를 냈고, 누군가는 다음엔 진짜 싸움 붙여보자며 킬킬거렸다. 조현우가 멀찍이서 그 소란을 지켜보다가 그냥 지나쳤다. 적당히 하라는 말도 이번엔 없었다. 시선만 잠깐 태오 쪽에 머물다가 사라졌다. 뭐야, 저 반응. 태오는 그 뒷모습을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혼내지도 않고, 편들지도 않고. 관찰만 하는 건가. 태오는 교실로 들어가며 통찰을 다시 열었다. [서하린] 【전투광】 S랭크. 특이사항 : 전투 상대의 강함을 판별하는 감각이 예민함. 판별하는 감각이라. 태오는 그 문구를 곱씹었다. 단순히 시비를 건 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강한지 약한지 냄새로 맡는 스킬이라면. 어제 부순 의자가 신호탄이 된 셈이다. 조용히 지내려던 계획이 벌써 삐걱거리고 있었다. 태오는 자리에 앉으며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앞으로 며칠은 시끄러워지겠네. 수업 시간 내내 서하린 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면 감시하는 눈빛이었다. 태오는 애써 무시했다. 점심시간에도, 종례 시간에도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게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폭풍 전 고요함이라는 말이 딱 이럴 때 쓰는 건가. 그날 밤, 태오는 평소보다 이르게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이 몰려왔다.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어둠이 다르게 열렸다. 평소와 다른 감촉이었다. 발밑이 없는 느낌. [경고: 이번 악몽의 형태가 이전과 다릅니다.] 낯선 알림음이 울렸다. 뭐? 태오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나 눈을 뜬 곳은 여전히 어둠이었다. 이전과 다르다는 게 뭔데. 대답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형체가 아니었다. 형체보다 훨씬 큰, 윤곽조차 흐릿한 무언가였다. 태오의 손끝이 얼어붙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악몽들과는 결이 달랐다. 익숙한 두려움이 아니라, 낯선 두려움이었다. 이게 뭔데. 대답은 없었다. 어둠만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삼켜지는 것 같았다. 태오는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통찰. 태오가 다급하게 스킬을 불렀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름조차 뜨지 않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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