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조용히 좀 살고 싶었는데

3화

선택권이라는 게 뭔지는 그날 저녁 김하린이 다시 정리해줬다. "매 학기 클래스별 최우수자에게 특권으로 부여되는 권리예요. 원하는 반으로 배치를 바꿀 수 있는 권리인데, 보통은 상위 클래스로 옮기려고 쓰죠." "그런데 왜 최우수자가 최하위 클래스로 와." "그게 이례적인 거예요. 학원 개교 이래 처음이래요." '그럼 나 때문이라는 소리네.' 말이 되나 싶었는데, 곱씹을수록 그게 제일 말이 됐다. 다른 이유를 찾으려 해봤지만 도무지 나오는 게 없었다. K클래스가 뭐 볼 게 있어서 굳이 여길 오나. 성적도 바닥이고, 시설도 낡았고, 심지어 담임조차 매년 바뀌는 반이었다. "확실해요?" "확실할 것까지야,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거지." '근데 이 느낌이 항상 맞더라.'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소란의 중심이 뭔지 눈으로 확인했다. K클래스 앞문에 벌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안이 아니라 밖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었다. 복도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서 안을 들여다보는 애들도 있었다. "진짜 온다고?" "이가 장녀가 여길 왜." "미쳤나봐, 진짜로."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그 무리를 지나쳐 교실로 들어섰다. 평소보다 시선이 몇 배는 더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한테 별 관심 없던 애들까지 힐끔거렸다. 다은과 소라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둘 다 표정이 미묘했다. "지우야, 소식 들었지." 소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대충." "근데 왜 하필……"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 전체가 동시에 그쪽을 봤기 때문이다. 문 앞에 선 여학생은 확실히 사람들이 저렇게 웅성거릴 만한 외모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 흐트러짐 없는 자세, 교복조차 맞춘 것처럼 딱 맞았다. 걸음걸이도 자연스러운데 어딘가 훈련된 것처럼 각이 잡혀 있었다. 그리고 눈빛은, 뭐랄까, 웃고 있는데 웃는 게 아닌 눈이었다. '저거 좀 무서운 눈인데.' 교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방금 전까지 킥킥거리던 애들도 입을 다물었다. "안녕하세요. 이서연입니다." 담임이 옆에서 뭐라고 소개를 덧붙였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목소리가 낮고 또렷했다. 가문 이름을 굳이 붙이지 않아도 저 태도만으로 어느 정도 급인지 짐작이 갔다. 그 애의 시선이 곧장 나에게로 왔고, 정확히 나한테서 멈췄다. '…이거 좀 부담스러운데.' 교실 안 시선이 다시 한번 나한테 옮겨왔다가 서연에게 돌아갔다. 서른 명 남짓한 애들이 눈알만 굴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강지우 학생, 옆자리로 옮기겠습니다." 선생님 말이 아니었다. 이서연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 담임은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어, 저기, 자리는 원래 배정된 대로……" "제가 요청드렸는데요." 목소리에 날카로운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한 마디에 담임이 바로 접었다. 담임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진짜 이렇게 되는 거야?' 이가 가문 이름값이 이 정도인가. 아니면 그냥 담임이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건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둘 다 결과는 같았으니까. 다은은 눈에 보이게 굳었다. 내 옆자리, 그러니까 지금 다은이 앉아 있는 자리로 이서연이 오겠다는 뜻이었다. "저기, 저 여기 이미……" 다은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이서연은 눈길도 주지 않고 짐을 그 옆 빈자리로 옮겼다. 원래 옆이 아니라 뒷자리였다. "뒤에 앉을게요. 급하게 자리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그건 또 뭔 예의야.' 말은 매너 있게 하는데 태도에서 느껴지는 건 전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마치 이미 다 계산해놓은 것 같은. 다은 자리를 뺏지 않은 게 배려가 아니라, 애초에 뺏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 같았다. 내 뒷자리를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걸 다 얻었으니까. 소라가 내 팔을 슬쩍 잡았다. "지우야, 저 사람 눈빛 봤어? 완전……"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냥 어깨만 떨었다. '나도 봤어. 나도 좀 쫄렸어.' 수업이 시작됐지만 아무도 제대로 듣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칠판을 보는 척하면서 눈알만 뒤로 굴리는 애들이 태반이었다. 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하려고 애썼는데, 무시가 잘 안 됐다. 누가 뒤에서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그게 어떻게 느껴지는지, 이날 처음 제대로 알았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반 여학생들이 이서연 자리 주변으로 몰렸다. "왜 K클래스로 온 거야?" 누군가 대놓고 물었다. 이서연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관심 있는 사람이 여기 있어서요." 시선이 다시 나한테로 쏠렸다. '아, 이거 진짜 부담스러운데.' 몰려든 애들 눈에서 질투 반, 호기심 반이 뒤섞여 있는 게 보였다. 누군가는 나를 새삼스럽게 다시 훑어봤다. '저 애가 뭐가 있길래' 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냥 창밖을 봤다. 무시한다기보다는, 이럴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몰랐다. 중학교 때였다면 이 정도 시선만으로도 숨이 막혔을 텐데, 지금은 그냥 귀찮다는 느낌뿐이었다. 사람이 참 적응이 빠르구나 싶었다. 김하린이 그날 점심에 급하게 나를 찾아왔다. 식당 구석 자리로 나를 끌고 가서 앉히더니 곧바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서연 쪽은 배경 좀 알아봤는데요.〉 "뭔데." 〈이가는 건국 18대가 중에서도 서열이 꽤 높은 집안이에요. 근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다른 가문들한테 조금씩 밀리는 분위기였대요.〉 "그거랑 나랑 뭔 상관인데." 〈지우 학생 때문에 여기 온 게 아니라, 지우 학생을 통해서 뭔가를 얻으려는 거일 수도 있어요.〉 "뭘 얻어." 〈그건 저도 아직 몰라요. 근데 이가가 최근에 강가 쪽이랑 몇 번 접촉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정확한 내용은 안 나와 있고요.〉 김하린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그때 다 이해하지 못했다. 강가라니, 그건 또 어디서 나온 이름인가. 다만 이서연이 나를 보는 그 눈빛, 좋아한다기보다는 관찰한다는 느낌의 눈빛이 계속 신경에 걸렸다. '좋아하는 눈이 저러면 좀 무섭잖아.'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점심시간이 지나갔다. 김하린은 뭔가 더 캐보겠다며 자리를 떴고, 나는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오후 수업이 끝나갈 무렵, 이서연이 다시 내 자리로 다가왔다. 발걸음 소리도 거의 안 났다. 뒤에서 다가오는 걸 느끼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옆에 서 있었다. "강지우 학생." "…왜." "이번 학급 위원장 선거, 제가 나갈 생각이에요." '뭐, 뜬금없이 그건 왜.' "K클래스는 원래 위원장 안 뽑는 걸로 알았는데." "이제부터 뽑을 거예요."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질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일을 통보하는 말투였다. 주변에서 그 말을 들은 애들 표정이 다 굳는 게 보였다. 누군가는 대놓고 시선을 피했고, 누군가는 숨죽인 채 눈치만 살폈다.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담임조차도 저 애 말에 반박 한번 못하고 자리를 옮겨줬는데, 위원장 자리 하나 만드는 게 뭐 대수겠나. 이미 이 반의 규칙이 바뀌기 시작한 게 느껴졌다. 불과 하루 만에. 뭔가가 이 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 내가 서 있다는 게, 제일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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