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조용히 좀 살고 싶었는데

2화

K클래스에 배치된 첫날 오후, 담임이라는 사람이 내 서류를 조용히 훑어보다가 한숨을 쉬는 걸 봤다. 이름은 최두식이라고 했다. 나이는 오십 줄쯤 되어 보였고, 넥타이가 항상 반쯤 풀려 있는 게 특징이었다. 서류를 넘기는 손가락이 유난히 느렸다. "사회봉사점수 오십 점, 등교일 이십 회." 말투에 이미 결론이 담겨 있었다. 마치 판결문 읽는 것처럼. '그게 뭔 죽을 죄라도 되는 것처럼 보지 마세요.' 중학교 때 학교를 거의 안 나갔던 건 사실이다. 여자애들이 있는 공간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발작 수준의 공포였으니까. 복도에서 마주치기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교실 문을 열기 전에 손이 떨려서 세 번쯤 되돌아간 적도 있었다. 사회봉사점수는, 정확히는 학교 밖에서 벌인 자잘한 사건들 때문이었는데 자세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그냥 안 좋은 일들이 있었다고만 해두자. 최두식은 서류를 덮으며 나를 한 번 힐끗 보고는 별다른 말 없이 배정표를 내밀었다. "K클래스로 가." '설명이 그게 다예요?' 어쨌든 이 학교는 그 두 숫자만 보고 나를 '문제아'로 분류한 모양이었다. 숫자 두 개로 사람 하나를 정의하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새삼스러웠다. 김하린이 방과 후에 나를 데리러 왔을 때 처음으로 학교의 서열 시스템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줬다. 차 안에서 안전벨트를 매는 동안 그녀는 태블릿 하나를 꺼내며 말을 시작했다. "이 학교 클래스는 성적, 가문 배경, 사회봉사점수, 등교율을 종합해서 매겨져요. A클래스는 명문가 자녀 중에서도 성적 최우수자들이고, K클래스는… 문제 있는 애들 모아놓은 반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럼 나는 성적도 안 봤겠네." "사회봉사점수랑 등교율이 워낙 안 좋으니까요. 성적 반영 여지가 없었을 거예요." '하, 참 공평하게 안 봐주네.' 태블릿 화면에 학교 전체 배치도 같은 게 떴다. A부터 순서대로 내려가면서 색깔이 점점 흐려지는 구조였다. K는 맨 아래, 회색에 가까웠다. "저게 색깔로 표시된 거야?" "등급이 낮을수록 학교 관심도가 떨어진다는 뜻이죠. 예산 배정부터 다르다고 들었어요." 김하린은 차 문을 열면서 덧붙였다. "근데 지우 학생, 그거 아세요. K클래스 자체가 원래는 없던 반이에요. 남학생 배치 정원 맞추려고 급하게 만든 자리랬어요." "그럼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간 첫 애구나." "그렇게 되는 거죠." '첫 삽 뜨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 영광이야.' 뭔가 찜찜했지만 딱히 곱씹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게 나중에 얼마나 커질 문제인지 전혀 몰랐으니까. 다음 날부터 진짜 학교생활이 시작됐다. 교실 문을 여는 순간, 삼십 명 가까운 시선이 일제히 나한테 쏠리는 걸 느꼈다. 등에 식은땀이 훅 올라왔다. K클래스 여학생들은 처음 며칠 동안 나를 무슨 희귀동물 보듯 했다. 말을 걸었다가 얼굴이 빨개져서 도망가는 애도 있었고, 아예 눈도 안 마주치는 애도 있었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뒤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 동물원 원숭이도 이 정도 관심은 못 받겠다.' 옆자리 한다은은 후자였다. 키가 178센티미터로 반에서 제일 크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큰 키 때문에 늘 시선을 받아서 오히려 소극적이 됐다는 얘기도. 그런데 이상하게 내 옆에 앉게 된 이후로 나한테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처음엔 그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애들은 눈도 못 마주치는데, 다은만 유독 나를 똑바로 쳐다봤으니까. "지우 씨, 필기구 없으면 저 거 쓰세요." 다은이 슬쩍 샤프 하나를 내 책상에 밀어 놓았다. "고마워." "…아니에요." 대답하면서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걸 봤는데, 나는 그게 별 뜻이 없는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친절한 애구나.' 다은은 그 뒤로도 종종 필기구나 프린트물을 슬쩍 밀어주는 식으로 도움을 줬다. 말은 별로 없었지만, 행동으로 뭔가를 표현하는 애 같았다. 한번은 내가 프린트를 놓치고 왔는데 다은이 자기 것을 통째로 넘겨준 적도 있었다. "넌 뭐 봐?" "…괜찮아요. 저 기억력 좋아요." 그날 다은은 자기 프린트도 없이 필기를 했다. 반대편 쪽에는 윤소라라는 애가 있었다. 강원도 상원가 출신이라고 했고, 서울로 전학 온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다. 그 애는 다은과 정반대로 늘 이것저것 물어봤다. "지우야, 여기 급식실은 원래 이렇게 조용해?" "저기, 매점에서 파는 거 다 무료인 거 알아?" "근데 A클래스랑 K클래스는 왜 건물 자체가 다른 거야?" 순진하다는 말이 딱 맞는 애였다. 서울 여학생들 특유의 눈치 게임이랄까 그런 걸 아직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질문 하나 던지고 대답을 기다리는 눈이 반짝반짝했다. 그게 웃기기도 하고 조금 신선하기도 했다. "소라야, 그건 다른 애들한테 물어봐. 나도 신입이라 몰라." "아, 그런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신기하게 소라는 계속 나한테 물어왔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이 반에서 나 말고는 물어볼 사람이 마땅치 않은 걸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냥 내가 편한가.' 점심시간이 되면 다른 반 여학생들이 K클래스 앞을 지나가며 슬쩍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 A, B클래스 쪽 애들이 그랬다. 처음엔 한두 명이던 게 며칠 사이 다섯, 여섯 명씩 무리를 지어 지나갔다. 교복 색깔만 봐도 어디 반인지 알 수 있었는데, 파란 넥타이는 A클래스, 초록 넥타이는 B클래스였다. "쟤가 걔야?" "응, 근데 진짜 예쁘게 생겼네." '예쁘다는 말은 그렇게 대놓고 하는 게 아닌데.' 대놓고 관찰당하는 기분이 별로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불쾌한 것도 아니었다. 뭐랄까, 관심이 나를 향한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지언정 겁이 나지는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진작 도망쳤을 상황인데. '많이 변했네, 나도.' 이상한 건 그 시선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났다는 거였다. 처음엔 신기해서 보러 오는 정도였는데, 점점 특정 인물을 언급하는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서연 선배도 안다는데?" "진짜?" 그때는 그 이름이 누군지 전혀 몰랐다. 그런 시선들이 며칠째 반복되던 어느 날, 김하린이 학교 게시판 사진을 찍어서 보내왔다. 〈이거 보세요.〉 사진에는 A클래스 정기 성적 발표 명단이 있었고, 맨 위에 낯선 이름이 박혀 있었다. 이서연. 〈이가(李家) 장녀예요. 이번 학기 A클래스 최우수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게, 지금 그쪽 클래스 게시판에 뭔가 붙었대요.〉 메시지를 보는 동안 손끝이 살짝 떨렸다. 왠지 좋은 소식은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김하린의 메시지 뒤로 곧 학교 전체 공지 알림이 울렸다. 선택권 행사 신청서 접수 완료. 신청인: 이서연. 대상 클래스: K. 순간 교실 여기저기서 휴대폰 알림이 동시에 울리는 소리가 났다. 다은이 폰 화면을 보다가 손을 떨었고, 소라는 놀라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다. "왜, 왜 그래?" 소라가 다급하게 화면을 내밀었다. 공지 하단에 굵은 글씨로 이런 문장이 있었다. 'A클래스 최우수자 이서연, 선택권을 행사하여 K클래스로 전학을 신청함.' 교실 전체가 순식간에 소란해졌다. 누군가 소리쳤다. "이서연이 왜 K클래스로 와!" 다른 애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문 쪽으로 뛰어갔다. "야, 이거 진짜야? 장난 아니지?" "공지에 떴는데 장난일 리가 없잖아!" 다은은 폰을 손에 쥔 채 얼어붙어 있었고, 소라는 옆에서 계속 "왜, 왜 그런 거야?"만 반복했다. 나는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A클래스 최우수자가, 굳이 선택권을 써서, 하필 문제아들 모아놓은 K클래스로 전학을 신청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야, 이거.' 그리고 그 이름이 앞으로 뭘 뜻하게 될지, 그때는 전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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