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대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밤바람이 등 뒤로 스치고 지나갔다.
낮 동안 걸었던 산길의 흙냄새가 아직 옷자락에 남아 있었다.
발바닥이 화끈거렸다.
하루 종일 걸은 탓이었다.
그런데도 대문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공기는 그 모든 열기를 단번에 식혀버릴 만큼 차가웠다.
문 앞에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본 순간, 숨이 멈추는 듯했다.
검은 긴옷이 발끝까지 흘러내리듯 걸쳐져 있었다.
옷자락 끝은 밤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 뿌리를 박은 것처럼.
얼굴에는 부리 모양의 흰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그 위로, 짙은 녹색 유리 안경이 눈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달빛이 그 안경 표면에 부딪혀 기묘한 빛을 냈다.
초록빛과 흰빛이 뒤섞여, 사람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존재처럼 보였다.
(이게... 까마귀 마녀.)
박도윤의 설명이 과장이 아니었다는 걸 실감했다.
그는 분명 말했었다.
"그 저택 주인, 사람 같지가 않아. 조심해."
그때는 그저 겁이 많은 사람의 과장이라 여겼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말을 온몸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적어도 그런 느낌이었다.
안경 너머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시선의 무게만은 분명히 느껴졌다.
어깨가 짓눌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나는 그 무게를 견디며 침을 삼켰다.
목이 말라왔다.
"...늦은 시간에 실례합니다."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박도윤 씨 소개로 왔습니다. 강하준이라고 합니다."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었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대문 안쪽 어딘가에서 울렸다.
그 소리마저 이 저택 안에서는 다른 색으로 들리는 듯했다.
나는 배낭에서 추천장을 꺼내 두 손으로 내밀었다.
손이 떨리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녀는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가늘고 흰 손을 뻗어 받았다.
손끝이 유난히 차가워 보였다.
달빛 아래서 그 손은 마치 핏기가 전혀 없는 것처럼 창백했다.
종이를 펼쳐 훑어보는 그녀의 동작은 느리고 정갈했다.
글자를 하나하나 눈으로 짚어가는 듯,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정적이 흘렀다.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만 들렸다.
평소라면 평온했을 그 소리가, 지금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멀리서 풀벌레 우는 소리도 들렸다.
그 소리마저도 이 순간에는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발끝으로 땅을 살짝 눌렀다.
긴장을 삭이려는 습관이었다.
"가정부 자리를 구한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성실하게 일하겠습니다. 우물 굴착 일도 했었고, 웬만한 집안일도..."
그녀가 손을 들어 나를 제지했다.
말이 끊겼다.
손짓 하나에 담긴 위압감이 상상 이상이었다.
그녀는 추천장을 접어 옷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식사와 잠자리는 제공합니다.]
그 목소리는 마스크 안쪽에서 울리는 듯 미묘하게 변형되어 있었다.
하지만 또렷했다.
사람의 목소리라기엔 어딘가 결이 다른, 낮게 깔리는 울림이었다.
[급여는 매달 초 지급하겠습니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제 방과 지하는 함부로 들어오지 마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질문은 최소한으로.]
그녀가 덧붙였다.
[제가 먼저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 마세요.]
(질문하지 말라니,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지.)
의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삼켰다.
지금은 지붕 아래 잠잘 곳이 필요했다.
배가 고팠고, 다리가 떨려왔다.
삼 년 만에 손에 넣은 자유였다.
이 자리를 놓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녀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안경 너머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침묵이 몇 초였는지, 몇 분처럼 느껴졌다.
[들어오세요.]
그녀가 몸을 돌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배낭을 다시 고쳐 메고 그 뒤를 따랐다.
대문이 등 뒤에서 삐걱, 낮은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소리가 오래도록 귓가에 남았다.
저택 내부는 어두웠지만 깔끔했다.
복도에는 촛불 몇 개가 켜져 있었고, 벽에는 낡은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그림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없었다.
그저 텅 빈 눈으로 복도를 지나가는 나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어디선가 은은한 약초 냄새가 풍겼다.
쌉쌀하면서도 어딘가 달큰한,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다.
(이 사람, 대체 뭘 하는 사람이지.)
복도 바닥은 나무로 되어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낮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마치 저택 전체가 숨을 죽이고 우리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천장이 높았고, 창문은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바깥의 달빛조차 거의 스며들지 않았다.
그녀는 복도를 지나 부엌 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여기서 주로 식사를 준비하시면 됩니다."
부엌은 오래된 화로와 나무 도마, 여러 종류의 향신료 병들로 채워져 있었다.
선반 위에는 마른 약초 다발이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생선 비린내와 흙 냄새가 뒤섞인 독특한 공기가 감돌았다.
화로 안에는 재가 남아 있었는데, 아직도 미미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누군가 여기서 계속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는 뜻인가.)
[제 방은 이층 끝입니다. 지금 당장은 필요 없으니 오지 마세요.]
그녀가 말했다.
[가정부 방은 이쪽입니다.]
그녀가 복도 끝의 작은 방을 가리켰다.
문을 열자 좁지만 정돈된 방이 보였다.
낮은 침대와 작은 책상이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낡은 촛대가 하나 놓여 있었고, 심지에는 아직 타다 남은 불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미리 준비해 둔 듯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대답 없이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갔다.
검은 옷자락이 바닥을 스치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방문 앞에 선 채로 한참을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쉽게 채용이 된다고?)
박도윤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분명 다른 곳도 알아봐 주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뒤로하고 이곳으로 향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했던 선택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 배낭을 내려놓았다.
온몸이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삼 년의 수용소 생활, 오늘 하루의 배신, 그리고 이 낯선 저택까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어깨가 뻐근했다.
발바닥은 이미 감각이 무뎌져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는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귓속에서 낮은 울림이 들렸다.
윙, 하는 소리가 귀 안쪽을 긁는 듯했다.
손끝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뭐지, 이거.)
숨이 가빠지고 시야 가장자리가 검게 물들었다.
오래전 수용소에서 배급이 끊긴 날, 딱 이런 느낌이었다.
허기와 피로, 그리고 억눌러왔던 긴장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감각.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박동이 귓가에까지 울려왔다.
나는 무언가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손끝에 걸린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야가 완전히 좁아졌다.
방 안의 촛불 하나가 점처럼 작아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하지만 손끝은 허공을 스쳤다.
쿵.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의식이 흐려지는 그 마지막 순간,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느리고 조용한, 그러나 분명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음이었다.
사각, 사각.
검은 옷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함께 섞여 들렸다.
그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방문 앞에서 멈추는 듯했다.
나는 그 소리를 끝까지 듣지 못한 채,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