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흙먼지가 신발 밑창에 달라붙었다.
동림마을로 들어서는 길은 예전 그대로였다.
느티나무 세 그루가 마을 어귀를 지키고 있었고, 그 아래 낡은 정자에는 늙은 개 한 마리가 늘어져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 풍경을 바라봤다.
(삼 년이라니.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시간이었다.)
바람이 느티나무 잎사귀를 흔들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예전에도 저 소리를 들으며 마을 어귀에 서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윤아와 함께였다.
등에 멘 배낭은 낡을 대로 낡아 있었다.
안에는 갈아입을 옷 두 벌과 세면도구, 그리고 제대 서류가 전부였다.
북방에서 돌아오는 트럭 안에서도, 포로교환 절차를 밟는 내내도 나는 이 순간을 그려왔다.
마을 어귀에 서서 익숙한 냄새를 맡는 순간을.
흙냄새와 볏짚 냄새, 그리고 저녁이면 어디선가 풍겨오던 밥 짓는 냄새까지도.
그런데 실제로 마주한 공기는 생각보다 서늘했다.
바람은 분명 여름의 것이었는데, 살갗에 닿는 느낌은 겨울의 그것과 비슷했다.
(기분 탓이겠지.)
나는 그렇게 되뇌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을회관 앞을 지날 때 몇몇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나를 알아본 기색이 역력했다.
누군가는 눈을 크게 떴고, 누군가는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서둘러 움직였다.
하지만 누구도 먼저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한 아주머니는 빗자루를 든 채로 슬쩍 고개를 돌렸고, 담배를 피우던 남자는 담배 연기 뒤로 시선을 숨겼다.
마당에서 놀던 아이 하나가 나를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가, 곧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에게 손을 붙잡혀 집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뭐지, 이 반응은.)
나는 애써 태연한 척 걸음을 옮겼다.
제대군인이 돌아왔다고 해서 꽃다발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낯선 취급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치 내가 이 마을 사람이 아니라,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낯선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발밑의 흙길이 유난히 딱딱하게 느껴졌다.
골목을 돌아서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덕수철물점의 김덕수였다.
그는 가게 앞에 나와 진열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낡은 삽과 곡괭이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고, 그 사이로 그의 굽은 등이 보였다.
삼 년 전에도 저 자리에서 저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서둘렀다.
"덕수 형님, 저 왔습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짧은 순간, 그의 눈동자에 무언가가 스쳤다.
반가움이 아니었다.
곤란함, 혹은 불편함에 가까운 그것이었다.
그 표정은 마치 반가운 얼굴을 봤다가, 순간적으로 뭔가를 떠올리고 얼른 감춘 사람의 것이었다.
"어... 하준이. 왔구나."
그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손에 든 망치를 괜히 만지며 시선을 피했다.
손가락으로 망치 손잡이를 몇 번이나 문질렀다.
"그래, 몸은 괜찮고?"
"네, 괜찮습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진열대 정리에 집중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잠시 그를 바라봤다.
(뭔가 있다.)
직감이라는 게 이럴 때 쓰이는 말인가 싶었다.
수용소에서도 이런 종류의 침묵을 겪은 적이 있었다.
누군가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을 때, 공기 자체가 무거워지는 그 느낌.
지금 덕수 형님에게서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저... 형님, 요즘 마을 소식 좀 궁금해서요."
"그런 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망치를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탁.
그 소리가 골목 안에 잠깐 맴돌다 사라졌다.
나는 더 묻지 못하고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몇 걸음 걷다가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마을 중심가를 지나며 나는 몇 번이나 같은 종류의 반응을 마주했다.
인사를 건네면 짧게 받아치고 서둘러 자리를 뜨는 사람들.
멀리서 나를 보고 다른 길로 돌아가는 아이 손을 잡은 여인.
가게 문을 슬며시 닫는 노인.
내가 지나갈 때마다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가, 내가 멀어지면 다시 소리를 낮춰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듯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포로가 된 것이 죄는 아니었다.
오히려 살아 돌아온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의 눈빛에는 이상한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
동정도 아니고, 반가움도 아니고, 그저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곤란함.
혹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자의 어색함.
나는 그 시선들을 하나씩 지나치며 걸었다.
해가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마을 하늘에 붉은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지붕 위로, 담장 위로 붉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평소라면 아름답다고 느꼈을 그 빛이, 오늘은 왠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림자가 길어지는 시간이다.)
나는 애써 그 생각을 떨쳐냈다.
발걸음을 서둘러 노윤아의 집이 있는 골목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을 우물가를 지날 때였다.
빨래를 하던 아주머니 둘이 나를 발견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물 젓는 소리와 빨래 방망이 소리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시작됐다.
귓속말이었지만, 몇 마디는 바람에 실려 내게까지 닿았다.
"...포로였다며..."
"...그런데 노윤아는..."
말소리가 뚝 끊겼다.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우물 물 위로 붉은 하늘빛이 흔들리며 비쳤다.
(윤아 얘기가 왜 나와.)
노윤아는 내 약혼녀였다.
징집되기 전, 우리는 이듬해 봄에 혼인하기로 약속했었다.
봄이 오면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서 작게라도 잔치를 벌이자고, 둘이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삼 년 동안 나는 그 약속을 붙잡고 버텨왔다.
수용소의 차가운 밤에도, 배급이 끊긴 날에도, 그 약속이 유일한 온기였다.
동상에 걸린 발가락을 움직이며, 나는 봄이 오면 만날 얼굴을 떠올리는 것으로 밤을 견뎠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나는 걸음을 서둘러 아주머니들 곁을 지나쳤다.
그들은 내가 다가오자 재빨리 말을 멈추고 빨래에 집중했다.
방망이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탁, 탁.
지나치는 순간, 한 아주머니가 나를 힐끔 쳐다봤다.
그 눈빛에는 동정과 난처함이 섞여 있었다.
마치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우물에서 멀어질수록 등 뒤에서 다시 소리 낮춘 말소리가 이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내 이야기였다.
마을 골목 끝, 노윤아의 집이 보이는 곳까지 왔다.
낮은 담장 너머로 마당이 보였다.
예전 그대로의 마당이었다.
장독대도 그대로였고, 마당 한켠에 심어둔 작은 감나무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예전과 다르게 마당 한쪽에 낯선 남자 신발이 놓여 있었다.
크고 투박한 작업용 장화였다.
윤아의 아버지 것도 아니었고, 내가 알던 그 어떤 신발도 아니었다.
(저건 뭐지.)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등 뒤로 저녁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나뭇잎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그저 스치는 소리였을 텐데, 오늘은 어딘가 삐걱거리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붉은 하늘빛이 담장 너머 마당 구석까지 스며들어, 그 낯선 장화의 윤곽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나는 그 장화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발끝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멈춰 섰다.
대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이미 내 안에서 뭔가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손끝이 떨렸다.
삼 년을 견디게 해준 그 약속이, 지금 이 문 너머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걸 직감으로 알았다.
마을 사람들의 그 시선들이, 덕수 형님의 그 곤란한 표정이, 아주머니들의 끊긴 말소리가 모두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대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대문에 닿는 순간, 안쪽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