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며칠이 지나도록 유리아의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국어 시간에는 지문을 읽다가 모르는 한자어가 나올 때마다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고, 손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며 답답함을 삭이는 게 눈에 보였다. 수학 시간에는 아예 펜을 내려놓고 창밖만 바라보는 날도 있었는데, 선생님이 이름을 불러도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반 애들 몇몇은 대놓고 킥킥거렸고, 유리아의 뒷목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게 내 자리에서도 훤히 보였다.
담임은 몇 번이나 그녀를 따로 불러 상담을 했지만, 그럴수록 유리아의 얼굴은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상담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눈이 붉게 부어 있는 날도 있었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나 역시 묻지 않았다.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중간고사 성적표가 나오던 날, 교실은 또 한 번 소란스러워졌다. 전 과목 평균 30점대. 반 최하위. 담임이 성적표를 나눠주는 짧은 순간에도 여기저기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와, 진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쟤 무슨 특혜로 들어온 거 아니야?"
몇몇 애들이 노골적으로 수군거렸고, 몇몇은 안타까운 척하면서도 눈빛엔 은근한 우월감이 스쳤다. 성적표를 받아든 유리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종이 한 장이 그렇게 무거워 보일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뭔가 불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목뒤가 서늘하고,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쉬는 시간, 유리아가 성적표를 손에 쥔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떨림을 감추려는 듯 성적표를 서랍 깊숙이 밀어 넣고는 두 손을 무릎 위에 가만히 올려두었다. 나는 못 본 척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곁눈질로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그녀의 옆얼굴을 비추는데, 표정이 하도 굳어 있어서 마치 인형처럼 보였다.
"이러다 전형 취소될 수도 있대."
뒷자리 애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아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는 게 보였다. 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성적 미달로 자퇴하는 연예인들 종종 있잖아. 걔도 그렇게 되는 거 아니야?"
"쉿, 들리겠다."
들으라는 듯 낮춘 목소리였다. 유리아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지만, 책상 아래로 늘어진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방과 후, 나는 사물함에서 책을 챙기다가 유리아와 마주쳤다. 그녀는 혼자 남아 무언가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텅 빈 교실에 그녀 혼자 남아 있는 모습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매니저가 데리러 오거나 스케줄 때문에 정신없이 빠져나가야 했을 텐데, 그날은 웬일인지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처럼 느릿느릿 짐을 챙기고 있었다. 나는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그녀가 갑자기 나를 불러 세웠다.
"이도현."
"뭐."
"……부탁이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유난히 작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유리아는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결심한 듯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눈빛이 마치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절박해서, 나는 저절로 발이 멈춰버렸다.
"나 좀 가르쳐줄 수 있어?"
"뭘."
"공부. 성적 안 오르면 학교 못 다녀."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싶었지만, 그녀의 눈빛이 너무 절박해서 쉽게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물함 문을 붙잡은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과외 선생 구하면 되잖아."
"매니저 언니가 알아보고 있는데, 아무도 우리 스케줄 맞춰줄 사람이 없어. 스케줄이 워낙 불규칙해서, 다들 부담스러워하고. 그리고……"
그녀가 말을 멈췄다. 나는 그 뒷말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좀처럼 이어가지 못했다. 손가락으로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뭐."
"……너라면 괜찮을 것 같아서."
그 말에 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왜 나여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성적이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부탁을 받을 줄은 몰랐다. 나는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나도 내 공부하기 바빠."
"부탁이야."
"싫다니까."
나는 단호하게 자리를 떴다. 등 뒤에서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복도를 걸어 나오는 내내 발걸음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국민 아이돌의 가정교사라니, 상상만 해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괜히 얽혔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먼저 앞섰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잠을 설쳤다. 이불 속에서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는데, 유리아의 절박한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 성적이 떨어지면 학교를 못 다닐 수도 있다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애써 그 생각을 떨쳐내려 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낮에 봤던 그녀의 하얗게 질린 손끝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내가 왜 이렇게 신경 쓰는 거지.'
나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새벽이 다 되어서야 겨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나는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갔다. 교실은 텅 비어 있었는데, 유리아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침 햇살이 아직 흐릿하게 창문을 넘어오는 시간이었는데, 그녀는 그 어스름 속에서 홀로 노트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건 어제 배운 수학 문제였다. 답은 온통 틀려 있었고, 지우고 다시 쓴 흔적이 종이 위에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일찍 왔네."
내가 말하자 그녀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눈 밑이 살짝 그늘져 있었다. 밤새 혼자 문제를 풀어보려 애쓴 흔적이었다.
"……응. 조금이라도 해보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뭔가 가슴 한쪽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화려한 세상에서 살면서도, 이렇게 혼자 노트를 붙잡고 애쓰고 있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채로. 노트를 슬쩍 들여다보니 방정식 하나를 몇 번이나 다시 풀었다가 지운 자국이 보였는데, 그마저도 결국 답이 틀려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날 매니저라는 여자가 학교에 찾아와 담임과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걸 나는 복도 창문 너머로 목격했다. 두 사람의 표정이 하도 어두워서, 나는 그게 유리아의 성적 문제 이상의 무언가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매니저는 서류 같은 걸 손에 쥔 채 몇 번이나 담임에게 고개를 숙였고, 담임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이 오가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매니저가 직접 나를 찾아와 조용히 부탁을 건넸다. 복도 끝, 아무도 없는 구석으로 나를 부르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말을 걸었다.
"이도현 학생,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 순간 이 일이 결국 나를 피해가지 못할 거라는 예감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