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상자 안에는 시트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평범한 침대 시트였다면 애초에 이렇게 심장이 뛸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시트에 남은 흔적이었다. 얼룩진 부분이 유난히 선명했고, 그게 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색이 짙었다. 마른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가장자리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그 모양이 지도처럼 넓게 퍼져 있었다.
나는 상자를 다시 덮었다가, 다시 열었다가, 또 덮었다. 세 번쯤 그러고 나서야 이게 아무리 반복해도 사라질 얼룩이 아니라는 걸 인정했다.
동봉된 쪽지에는 짧은 글씨가 있었다.
[선생님이 절 밀어내니까 저도 뭐라도 남겨야죠. 이게 제 답이에요.]
글씨체가 예뻤다. 각 잡힌 궁서체도 아니고 흘려 쓴 필기체도 아닌, 학생다운 동글동글한 손글씨. 그 손글씨로 이런 문장을 썼다는 게 더 무섭게 느껴졌다.
손이 떨렸다. 이건 단순한 협박도 아니고 취향도 아니었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하나, 감정의 폭발이었다. 서하은이 나를 밀어내려는 순간 오히려 더 강하게 지목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직접적으로.
나는 그 시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상자를 든 채 현관에 서 있었다. 버릴 수도 없고, 그냥 둘 수도 없고, 신고를 하기엔 신고할 대상이 너무 명확하고 너무 무섭다. 이걸 태워야 하나. 아니, 태우면 냄새가 날 것 같고, 그것도 나름의 물증이 될 것 같아서 함부로 없앨 수도 없었다. 결국 상자를 옷장 맨 위 칸, 아무도 손댈 일 없는 자리에 밀어 넣었다. 증거로 남겨야 할지 처분해야 할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당장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을까 말까 고민한 시간은 채 이 초도 되지 않았다. 어차피 안 받으면 다시 걸려올 게 뻔했다.
"···여보세요."
"받았죠?"
서하은의 목소리였다. 낮에 문 너머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와는 다른 결이었다. 훨씬 낮고, 훨씬 진지했다. 장난기가 완전히 빠져 있는 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이게 뭡니까, 서하은씨."
"제 마음이요."
"이런 걸로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저요."
간단한 대답이었는데 반박할 말이 안 떠올랐다. 나는 상자를 넣어둔 옷장 쪽을 힐끗 돌아봤다. 마치 저 안에서 뭔가 소리라도 낼 것 같아서.
"선생님이 절 거부하는 순간, 저도 처음으로 뭔가 잃을 게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전엔 그냥 재밌는 게임이었는데."
"게임이요?"
"네. 근데 이제는 아니에요."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늘 자신감 넘치던 그 톤이 지금은 말줄임표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끊어졌다. 전화기 너머로 숨소리가 들렸다. 참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뭔가 억누르고 있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저는, 그러니까···"
"···서하은씨?"
"아니, 됐어요. 그냥, 저는 선생님이 진짜로 저 밀어내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이렇게라도."
"하은씨, 잠깐만요. 이건 대화로 풀 수 있는 문제 같은데."
"대화요? 선생님은 계속 대화로 풀려고 하시잖아요. 그런데 저는 대화 같은 거 필요 없어요. 저는 그냥,"
말이 뚝 끊겼다. 뭔가 삼키는 소리, 아니면 웃음을 참는 소리 같기도 했다.
전화가 뚝 끊겼다.
나는 손에 들린 휴대폰과, 방금 끝난 통화의 여운을 번갈아 곱씹다가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는지 뒤늦게 실감했다. 이건 단순한 갈취나 협박이 아니었다. 서하은은 진심으로 나에게 뭔가를 느끼고 있었고, 그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이 세계 기준으로도 상당히 극단적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관계의 우위가 완전히 반대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게 이런 형태로 드러날 줄은 몰랐다.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도 자꾸 옷장 쪽으로 시선이 갔다. 저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다 아는데도, 그게 마치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결국 새벽 세 시쯤까지 뒤척이다가 겨우 눈을 붙였다.
***
다음 날 학교에 가니 오태호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얼굴이 왜 그래요? 밤새 뭐 하셨어요?"
"···아무것도 안 했어."
"거짓말 되게 못 하시네."
웃으며 넘기려 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어제 받은 상자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시트를 대체 어디에 두어야 할지, 이걸 증거로 남겨야 할지 처분해야 할지, 실용적인 고민이 감정적인 혼란보다 먼저 떠오른다는 게 나 자신도 씁쓸했다.
"선생님, 눈이 완전 판다예요.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어요."
"태호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뭐가 중요한데요?"
말이 안 나왔다. 서하은한테 침대 시트를 받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게 무슨 얼룩인지 설명할 수도 없었다. 오태호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서하은 선배 때문이에요?"
심장이 덜컥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어제 그 선배 여기서 선생님 기다리는 거 봤거든요. 눈빛이 좀, 그, 무서웠어요. 원래도 좀 그런 사람인데 어제는 더."
"뭐가 무서웠는데."
"그냥, 뭔가 결심한 사람 같은 눈이었어요. 선생님, 그 선배랑 무슨 일 있으시죠?"
나는 대답을 피했다. 대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태호야, 너 숙제 다 했어?"
"우와, 선생님 지금 말 돌리시는 거 진짜 티 나요."
"…"
"저 그렇게 어리지 않아요. 뭔가 있는 거 다 알아요."
오태호가 팔짱을 끼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나한테 편하게 구는 학생인데, 가끔 이렇게 날카로운 순간이 있어서 당황스럽다. 나는 결국 한숨을 쉬며 손을 들었다.
"복잡한 일이야.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줄게."
"나중에가 대체 언젠데요."
"···글쎄다."
오태호는 뭔가 더 캐물으려다가, 종이 울리는 소리에 못 이기는 척 교실로 들어갔다. 뒷모습이 걱정스러워 보이는 게, 나보다 저 애가 더 눈치가 빠른 것 같아 씁쓸했다.
수업 시간 내내 정신이 딴 데 가 있었다. 칠판에 판서를 하다가 같은 줄을 두 번 쓰기도 하고, 학생이 질문을 했는데 엉뚱한 대답을 하기도 했다. 반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정할 기력도 없었다.
***
방과 후, 청람여고 방향에서 낯익은 실루엣이 교문 앞에 다시 나타났다. 서하은이었다. 어제 통화에서 흔들리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다시 여유롭게 웃는 얼굴이었다. 마치 어제의 통화가 없었던 일처럼,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런 균열도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우리 다시 얘기해요."
"저는 어제 그만하자고 분명히···"
"그건 어제고요."
그녀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았다. 힘이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이 세계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힘이 세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체감하니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손목이 삐걱거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고, 뿌리치려 해도 팔이 꼼짝하지 않았다.
"하은씨, 이거 놓고 얘기 좀."
"놓으면 선생님 도망가시잖아요."
"도망은 무슨, 저는 그냥···"
"그냥 뭐요? 그냥 저를 무시하고 싶다는 거죠?"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어제 전화 속에서 흔들리던 그 목소리와, 지금 이 여유로운 미소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어느 쪽이 진짜인지 가늠이 안 됐다. 아니, 어쩌면 둘 다 진짜인 걸지도 모른다. 그게 더 무서운 부분이었다.
"이제부터 거래 조건이 바뀔 거예요."
"바뀐다니, 뭐가요?"
서하은이 내 귀에 가까이 얼굴을 대며 웃었다. 숨결이 귓가에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이제 돈은 안 받을게요. 대신 선생님을 통째로 가져갈 거예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사람을 무슨 물건처럼."
"물건이요? 아니죠. 저한테는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거예요."
말투는 다정했지만 손목을 쥔 힘은 전혀 다정하지 않았다. 뼈가 눌리는 느낌이 나서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파요, 좀."
"아, 미안해요. 근데 안 놓을 거예요."
손목을 놓지 않은 채, 그녀는 나를 그대로 학교 밖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주변 학생들이 수군대는 소리, 오태호가 놀란 얼굴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선생님! 선생님, 어디 가세요!"
오태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지만, 서하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더 높였다.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고, 그럴 때마다 서하은이 손목을 더 세게 붙잡아 나를 붙들었다.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는 건지,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쳐다봤다. 몇몇은 휴대폰을 꺼내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게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 그런 실용적인 걱정이 또 먼저 떠올랐다. 이 와중에도 이런 계산이 먼저 든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나는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과, 이대로 끌려가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 사이에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그저 끌려갔다. 서하은의 손이 내 손목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고, 그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도는 이상하게도 뜨거웠다. 마치 그 안에서 뭔가가 끓고 있는 것처럼.
교문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도 나는 어떤 말도, 어떤 저항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