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나는 그 일을 거의 잊고 있었다. 사람은 원래 불길한 예감을 빨리 잊는다, 그래야 하루를 살 수 있으니까. 특히 나처럼 남의 세계에 뚝 떨어져서 보건교사 노릇을 하고 있는 처지엔 불길한 예감 목록이 너무 길어서, 어제 것 하나쯤 잊어버리지 않으면 밤에 잠을 못 잔다.
넉 달 전만 해도 나는 이 세계가 뭔지도 몰랐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백호남고 보건교사였고, 전임자의 인생과 기억이 어설프게 내 머릿속에 얹혀 있었다. 적응은 생각보다 쉬웠다. 사람 몸에 붙은 상처는 어느 세계에서나 비슷하게 생겼고, 밴드를 붙이는 방법도 비슷했으니까. 문제는 늘 상처 바깥에서 터졌다.
그날도 딱히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방과 후 보건실에 남아서 소모품 재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거즈가 몇 개 남았는지, 얼음팩이 얼마나 남았는지 세는 일은 지루했지만 마음이 편했다. 적어도 붕대는 나를 협박하지 않으니까.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여기 백호남고 보건실이죠?"
목소리가 먼저 들어오고, 사람은 그 뒤에 따라 들어왔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거즈 상자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교복을 보고 알았다. 청람여고였다. 짧게 자른 남색 재킷에 새겨진 배지가 낯익었다. 어제 창문 아래서 나를 올려다보던 그 무리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이런 종류의 얼굴이었다. 확신에 찬, 손해 볼 게 없다는 얼굴.
"그런데요. 누구세요?"
"서하은이요."
이름을 말하는 태도가 자기소개라기보단 명함을 던지는 것 같았다. 청람여고 교복 자체가 이렇게 야한 디자인인지, 아니면 저 학생이 손을 좀 본 건지 순간 헷갈렸다. 치마는 규정보다 확실히 짧았고, 셔츠 단추는 위에서부터 두 개가 풀려 있었다. 재킷 소매는 걷어 올려서 팔목의 얇은 팔찌 몇 개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서하은이라는 애는 보건실 안으로 들어와 아무렇지 않게 침대에 앉았다. 신발도 안 벗고.
"여기 학생 아니잖아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선생님, 유도부 오태호 알죠?"
오태호 이름이 나오자마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건 뭔가, 사고 친 건가. 순간 머릿속으로 최근 며칠간 오태호가 다쳐서 온 이력을 재빨리 되짚었다. 손목 삔 거, 코피, 어깨 탈구 한 번. 다 훈련 중 사고였다. 여학생이랑 얽힐 만한 사건은 딱히 없었는데.
"알죠, 우리 학교 학생인데."
"걔가 여기 자주 오죠? 다쳐서."
"거의 매일 오는데요, 그건 왜."
서하은이 다리를 꼬며 웃었다. 그 웃음이 어딘가 낚시하는 사람 같았다. 미끼를 던지고 입질을 기다리는 얼굴. 나는 그 얼굴을 보면서, 이 애가 오태호를 좋아해서 온 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 얘기를 할 때 저런 표정은 안 짓는다. 저건 사냥감 얘기할 때 얼굴이다.
"부탁이 있어서요."
"부탁이요?"
"오태호가 쓰는 체육복이요. 세탁 안 한 거로."
순간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머릿속으로 그 문장을 한 번 더 재생시켰다. 세탁 안 한 체육복. 그게 무슨 부탁이지.
"···네?"
"땀 묻은 거로요. 오늘 훈련한 거면 더 좋고."
나는 이 세계에 온 지 넉 달이나 됐지만 이런 요구는 처음이었다. 청람여고 학생이 남고 보건교사한테 찾아와서 남학생 체육복을 달라니, 이게 협박인지 부탁인지 감이 안 잡혔다. 원래 세계에서였다면 경찰서 갈 사안이었을 텐데, 이 세계엔 이런 일이 흔한 건지 아니면 이 애가 유독 특이한 건지 판단이 안 섰다.
"그걸 왜 저한테 부탁하세요? 오태호한테 직접 말하시면 되잖아요."
"그럼 재미없잖아요."
말투는 가벼웠는데 눈빛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나는 이게 협박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재미없다는 말 속에 이미 답이 있었다. 이건 남학생한테 직접 요청할 수 없는 성격의 물건이라는 뜻이고, 그렇다면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최소한 정상적인 목적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거절하면요?"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최대한 담담하게 나오길 바랐는데, 손끝이 살짝 시린 느낌이 들었다.
"음, 백호남고 교문 앞에 저희 애들이 매일 서 있는 거 아시죠? 선생님 얼굴, 저희 다 외웠는데."
협박의 정석이었다. 대놓고 위협하지 않지만 상상하게 만드는 방식.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등하교길 풍경을 떠올렸다. 교문 앞에 서서 담배 피우던 애들, 자전거에 걸터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훑어보던 애들. 그중 몇 명이 실제로 나를 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나는 계산을 시작했다. 이게 무슨 위험도의 상황인지, 내가 잃을 게 뭔지. 세탁 안 한 체육복 하나 넘겨주는 것과, 매일 등하교할 때마다 누군가에게 얼굴을 확인당하는 것. 저울질할 것도 없었다.
결론은 단순했다. 체육복 하나 넘겨주는 게 뭐 대단한 손해인가. 오태호는 매일 새 걸로 갈아입고 오니 딱히 아쉬울 것도 없을 거고, 나야 세탁 봉투에 담아서 건네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문제는 이게 정말 그것뿐인 일이냐는 거였는데, 그건 지금 당장 알 수 없으니 일단 나중 문제로 미루기로 했다. 나중의 나에게 미안하지만, 지금의 나는 살아야 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요? 학생이 무슨 조건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협상 모드로 전환된 뇌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돈으로 드릴게요. 만 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만 원."
"···삼만 원."
서하은이 미묘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 이렇게 순순히 흥정에 응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협상이 시작되니 갑자기 이 상황이 우스울 만큼 익숙해졌다. 나는 원래 세계에서도 벼룩시장 흥정 좀 해본 사람이다. 낡은 자전거 하나로 삼십 분을 끌었던 경력이 있는 몸이었다.
"오만 원. 안 되면 그냥 없던 일로 하죠."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철을 정리하는 척했다. 관심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게 흥정의 기본이다. 서하은이 잠시 나를 빤히 보다가 웃었다. 그 웃음에는 아까와는 조금 다른 결이 있었다. 재밌다는, 순수한 흥미.
"오만 원, 콜."
그렇게 나는 정체 모를 여고생과 오만 원짜리 체육복 거래를 성사시켰다. 말로 옮기니 더 이상해지는 문장이었지만, 통장에 오만 원이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이 정도면 그저 좀 이상한 부업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럴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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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오태호가 유도복을 벗어놓고 씻으러 간 사이, 나는 그 체육복을 봉투에 담아 놓았다. 어차피 안 쓰는 세탁 봉투였다. 오태호는 훈련이 끝나면 늘 보건실에 들러 얼음팩을 챙겨가는 습관이 있었는데, 오늘은 유도복을 벗어 사물함 옆에 던져놓고 곧바로 샤워장으로 뛰어갔다. 나는 그 옷을 집어 들면서, 이게 뭐 대단한 첩보작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게 스스로 우스웠다.
땀 냄새가 코끝을 훅 스쳤다. 훈련을 얼마나 세게 했는지 등판 부분이 완전히 젖어 있었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그걸 봉투에 밀어넣었다. 이건 그냥 물건이다, 그냥 물건이다, 몇 번이나 되뇌었다.
방과 후 다시 찾아온 서하은은 봉투를 받아 들자마자 코를 박듯 냄새를 확인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어서, 마치 시장에서 과일을 고르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오, 신선하네요."
그 말투에서 뭔가 소름이 돋았다. 신선하다니. 사람이 사람 체육복을 두고 그런 표현을 쓰는 게 정상인가. 나는 그 순간 이 거래를 취소하고 오만 원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반쯤 들었다가, 이미 돈을 받기로 한 이상 취소는 더 위험할 거라는 계산이 뒤따랐다. 협상은 성사되면 되돌리기 어렵다. 그게 흥정의 기본이었다.
"저기, 이거 대체 왜 필요하신 거예요?"
궁금해서 못 참고 물었다. 알아야 다음에 뭘 조심해야 할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알려드릴 수 없어요."
"제가 도와드리는 건데 알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권리는 돈 받으신 순간 사라졌어요, 선생님."
그 말이 얼마나 정확한 예언이었는지, 나는 며칠 뒤에야 깨달았다. 그때는 그냥 되바라진 여고생의 말장난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서하은은 봉투를 가방에 넣으며 마지막으로 나를 한 번 훑어봤다. 위에서 아래로, 아주 천천히. 마치 다음번엔 뭘 요구할지 미리 재고 조사를 하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그 시선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괜히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다음엔 다른 것도 부탁드릴게요."
"다른 거요?"
머릿속으로 벌써 최악의 시나리오 몇 가지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더 이상한 걸 달라고 하려나, 하는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기대하세요."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보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방금 벌어진 일을 곱씹었다. 오만 원을 벌었으니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고, 애써 그렇게 정리하려 했다.
나는 그때까지 이 일을 그저 조금 이상한 용돈벌이 정도로 여겼다. 오만한 판단이었다. 서하은이 사라진 복도 쪽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그게 정말 그녀의 웃음이었는지, 아니면 내 귀가 잘못 들은 건지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