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칠억 대신, 너를 지킨다

5화

세아가 우리 집에 온 지 열흘쯤 지났을 무렵, 나는 그녀에게 새 교복 재킷과 운동화를 사주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왔을 때 입고 있던 재킷은 팔꿈치가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었고, 운동화 밑창은 한쪽이 살짝 벌어져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났다.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나는 이미 눈여겨보고 있었다. 주말 오후, 백화점 아동복 매장 앞에서 세아는 몇 번이나 발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삼촌, 그냥 저 그거 안 사도 돼요." 나는 못 들은 척 점원에게 사이즈를 물었고, 세아는 옷걸이에 걸린 재킷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밀 때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더니 가격표 쪼가리가 남아 있는 걸 찾아 확인하려 했다. 나는 얼른 그 손을 막으며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신경 쓰지 마. 삼촌 요즘 벌이가 좋아서 그래." 로또 당첨 사실은 여전히 숨긴 채였다. 세아는 그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는 눈치였지만, 더 캐묻지 않고 그저 새 신발이 담긴 봉투를 품에 꼭 안고 걸었다. 백화점 유리문을 나설 때 그녀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가벼워 보였다. 그날 이후로 세아는 조금씩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부엌에서 계란프라이를 부치는 소리가 들려왔고, 프라이팬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이어 고소한 기름 냄새가 방문 틈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눈을 뜬 채 그 냄새를 맡으며 한참을 누워 있었다. 서툰 손으로 접시 두 개를 나란히 놓으며 그녀는 나를 불렀다. "삼촌, 밥 먹어요." 그 짧은 한마디가 이상하게도 가슴 깊은 곳을 데우는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혼자 먹던 밥상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더해진다는 게 얼마나 다른 일인지, 나는 그제야 실감했다. 계란프라이는 노른자가 터져 있었고 소금이 조금 과했지만, 나는 그걸 남김없이 먹었다. 세아는 내가 다 먹은 접시를 힐끔거리며 뭔가 확인하려는 눈치였고, 나는 일부러 밥그릇까지 싹싹 긁어먹는 시늉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작은 호의들이 하루하루 쌓여갔다. 학교 준비물이 필요하다는 말에 나는 퇴근길에 조용히 문구점에 들러 이것저것 사다 놓았다. 색연필 세트, 스케치북, 커터칼과 지우개 몇 개. 세아는 그걸 발견할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며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이런 거 안 사주셔도 되는데……" 하면서도 그녀는 그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필통 안에 정리해 넣었다. 반대로 세아도 나 몰래 청소를 해두거나, 퇴근하고 돌아오면 식탁에 간단한 반찬 몇 가지를 차려두는 식으로 마음을 갚으려 했다. 어느 날은 콩나물무침이, 어느 날은 계란말이가 놓여 있었다. 요리 실력이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나는 그 접시들을 볼 때마다 목이 메는 걸 참아야 했다. 그런 소소한 교환이 오갈수록 집 안의 공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현관에 벗어놓은 신발 두 쌍, 냉장고에 붙은 학교 시간표, 화장실 수건 두 장. 그것들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이 집이 더는 나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라는 게 실감 났다. 그날 오후, 나는 세아의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 근처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그녀가 이유 없이 뒤를 자꾸 돌아보는 것 같아서,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데리러 나가겠다고 말해두었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중, 딸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세아였다. 교복 치마 아래로 드러난 다리가 조금 떨리는 듯 보였고, 그녀의 시선은 자꾸 카페 창밖 쪽을 향해 있었다. 걸음걸이도 평소와 달랐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다가 겨우 몸을 숨긴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을 낮춘 채 카페 안을 훑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고, 그녀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안도한 표정으로 다가와 앉았다. "삼촌, 여기 있었네요." 그녀의 목소리에 평소보다 긴장이 섞여 있었다. 숨소리도 조금 빨랐다. 가방을 내려놓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무슨 일 있었어?" 내가 묻자 세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말을 흐리며 그녀는 다시 창밖을 흘끔거렸다. 손가락으로 컵도 아닌 테이블 모서리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그 시선을 따라가던 나는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길 건너편, 편의점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눈에 걸렸다. 회색 점퍼, 짧게 깎은 머리. 낯익은 체형이었다. 나는 순간 손끝이 얼음처럼 굳어지는 걸 느끼며 자리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심장이 갑자기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세아도 그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다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깨가 눈에 보일 정도로 들썩였다. "저 사람이에요…… 그날 그 사람." 박기석이었다. 한강공원에서 담배 화상을 입은 손등을 감싸며 사라졌던 그가, 이번에는 카페 유리창 너머에서 우리 쪽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편의점 처마 아래 서서 담배를 문 채, 시선만 이쪽으로 고정한 그 모습이 마치 사냥감을 지켜보는 짐승 같았다. 그의 입가에는 이죽거리는 웃음이 걸려 있었고, 그 웃음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나는 카페 안 다른 손님들을 빠르게 훑었다. 아무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채 각자의 대화와 노트북 화면에 몰두해 있었다. 오직 나와 세아만이 그 시선의 무게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삼촌……" 세아가 내 팔을 붙잡았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는 그 손을 꽉 붙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장이 다시 갓 잡은 활어처럼 펄떡였다. 카페 문이 딸랑 소리를 내며 열리는 순간, 박기석이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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