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칠억 대신, 너를 지킨다

4화

딸랑, 문에 달린 종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세아를 근처 카페 안으로 밀어 넣듯 데려갔다. 창가 자리에 앉히고 나서야 그녀의 손이 여전히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은 서로를 붙잡고 있으면서도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카운터로 가 뜨거운 코코아 한 잔을 시키고, 혹시 몰라 따뜻한 우유도 하나 더 추가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잔을 그녀 앞에 내려놓으며 최대한 목소리를 부드럽게 냈다. "천천히 마셔. 아무도 안 쫓아와." 그 말에 세아는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바닥으로 온기를 옮기려는 듯 몇 초간 가만히 쥐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삼켰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삼키고 나서야 어깨가 조금씩 내려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카페 안에 흐르는 잔잔한 재즈 음악과 원두 볶는 냄새가 공기 중에 섞여 있었다. 세아의 금발 단발머리가 조명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났고, 화영고등학교 교복 재킷 소매 끝이 살짝 해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실밥이 몇 가닥 풀려 있었고, 팔꿈치 부분은 색이 미묘하게 바래 있었다. 옷을 산 지 오래된 듯했다. 그 작은 디테일 하나가 이상하게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열일곱 살이면 한창 예쁜 옷 사 입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닐 나이인데. "저…… 삼촌은 왜 이렇게 갑자기 연락을 하셨어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테이블 위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잠시 대답을 고르며 컵을 매만졌다. 손끝으로 잔 표면에 서린 물기를 문지르면서. "SNS에서 네 글 봤어. 위험해 보이길래." 완전한 진실은 아니었지만 거짓도 아니었다. 세아는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랫입술이 눌린 자국이 남을 정도로. "……죄송해요. 이상한 글 올려서."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세가 밀려서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서 혼자 살고 있는데, 알바 자리도 몇 번 잘렸고…… 방법이 없어서 그런 글까지 올렸어요." 말을 하는 내내 그녀는 시선을 테이블에 고정한 채 손끝으로 잔 손잡이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손톱은 짧게 깎여 있었고, 어딘가 갈라진 부분도 보였다. 아마 설거지나 청소 같은 일을 오래 했을 손이었다. "어떤 알바였는데."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답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지만, 알아야 했다. "편의점, 카페, 식당…… 다 해봤는데, 사장님들이 자꾸……" 그녀는 말을 멈추고 잔을 더 세게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성인이 아니라서 오래 못 쓴다고 하기도 했고, 어떤 사장님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으니까.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 한쪽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부모를 잃고 혼자 남겨진 아이가 이런 방식으로 생계를 이어가려 했다는 사실이, 예전의 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 역시 부모님을 잃고 한동안 세상에 혼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았으니까. 그 시절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던 걸 기억하며, 나는 세아 앞에서 다르게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컵 속 코코아가 조금씩 식어가는 걸 보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세아를 데려간다면 방을 하나 더 마련해야 할 테고, 학교도 계속 다녀야 할 테고, 생활비도 늘어날 거였다. 하지만 통장에 찍힌 그 숫자를 떠올리면, 그런 걱정은 사치에 가까웠다. "세아야."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당분간 나랑 같이 있을래? 삼촌이 요즘 형편이 좀 괜찮아졌거든." 로또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냥 여유가 있다는 정도로만 둘러댔다. 세아는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그 눈빛이 마치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되나요? 제가 짐이 되진 않을까요." 그녀의 말끝이 흐려지며 목이 메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짐 아니야. 먼 친척이라도 가족이잖아." 나는 최대한 확신을 담아 말했지만, 속으로는 스스로도 이 결정이 맞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열일곱 살 여고생을 성인 남자 혼자 보호하겠다고 나서는 게, 세상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먼 친척이라는 관계가 있다고 해도, 남들 눈에는 그저 이상한 상황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저 아이를 다시 거리로, 저 늑대 같은 놈들 사이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세아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고맙습니다, 삼촌."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삼촌이라는 호칭이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먼 친척이라는 거리감이 지금은 오히려 서로를 지켜줄 방패처럼 느껴졌으니까. *** 카페를 나서며 그녀의 짐가방을 대신 들었다. 낡은 캐리어였다. 바퀴 하나가 살짝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손잡이 부분은 테이프로 감아놓은 흔적이 있었다. 생각보다 가벼운 무게였다. 이 안에 그녀의 열일곱 인생 전부가 들어 있다는 걸 생각하니 손끝이 저려왔다. 오피스텔로 향하는 길, 세아는 조심스럽게 내 옆에서 걸으며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골목을 지날 때마다, 신호등 앞에서 서 있을 때마다, 그녀의 시선은 자꾸만 뒤편으로 향했다. 그 불안한 시선이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괜찮아. 진짜 아무도 안 따라와." 나는 몇 번이고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세아는 그저 작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편의점 앞을 지날 때, 그녀가 잠시 멈춰 섰다. 유리창 너머로 진열된 삼각김밥과 도시락을 바라보는 눈빛에 뭔가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아마 저곳에서 일했던 기억이 떠올랐던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 역시 뒤를 몇 번 돌아보았다. 박기석의 그림자가 다시 나타날까 봐.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그 남자의 눈빛, 그 느끼한 웃음소리, 그리고 세아를 바라보던 그 짐승 같은 시선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오피스텔 현관에 도착해서야 세아는 조금 안심한 듯 어깨를 늦췄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불길한 예감은 그날 밤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로 남았다는 것을. 박기석 같은 놈들은 한 번 눈독 들인 상대를 그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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