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칠억 대신, 너를 지킨다

1화

딸랑, 사무실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임태호가 저 웃는 얼굴로 내 자리까지 걸어오는 순간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함께 따라왔으니까. 오늘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커피믹스를 타서 자리에 앉은 지 채 오 분도 되지 않았고, 컴퓨터는 아직 로그인 화면조차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저 발소리, 저 구두 굽이 바닥을 딱딱 짓누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부터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더니, 어제 회식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꺼내며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강도윤씨,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었나? 응?"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그 안에 든 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고, 나는 손끝이 저절로 말려드는 걸 느끼며 겨우 참았다. 그의 콧잔등에는 아직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어제 내 주먹이 정확히 박혔던 자리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렸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시선을 내리깔고 침묵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어제 그가 내 앞에서 한소미의 허리를 감싸 안고 웃던 장면이 다시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1년을 함께 산 여자가, 내 상사의 팔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다. 술잔을 채워주겠다며 다가온 그가 소미의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나는 그저 웃어넘길 수 있는 관계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회사 사람들끼리 흔히 있는 장난이라고. 그런데 소미가 그의 팔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어깨에 살짝 몸을 기울이며 뭐라고 속삭였고, 임태호는 그 말에 낄낄거리며 그녀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당겼다. 그 순간 테이블 위 술잔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의 기억이 떠오르자 관자놀이가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참았어야 했다. 어제 회식 자리에서 술잔을 들고 있던 손이, 임태호의 셔츠 깃을 그대로 붙잡아버렸던 그 순간을 몇 번이고 되돌리고 싶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고, 그는 코피를 흘리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순식간에 테이블이 뒤집혔고, 누군가의 술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뜯어말리는 사이에도 나는 그의 옷깃을 놓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손을 놓지 않았던 순간의 내가, 마지막으로 소미를 향한 미련을 붙잡고 있던 나였는지도 모른다. 술기운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변명해봐도 소용없었다. 오늘 아침 인사팀에서 온 메일 한 통이 모든 걸 확정지었으니까. 제목은 간결했다. 폭행에 의한 즉시 해고. 메일을 읽는 내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이의 신청이니 소명 절차니 하는 단어들이 화면 위에 떠 있었지만, 그 아래 첨부된 임태호의 서명을 보는 순간 그 모든 절차가 이미 무의미하다는 걸 알았다. "짐 정리는 오늘 안으로 해주고." 임태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킷 매듭을 매만졌다. 그의 눈매가 순간 서늘하게 좁아졌다가 이내 다시 웃음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소미도 이제 나랑 있는 게 편하다고 하더라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뭔가가 명치 아래에서부터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가 등을 돌려 걸어가는 걸 지켜보았고, 사무실 안의 시선들이 일제히 나에게 쏟아지는 걸 온몸의 피부로 느꼈다. 누군가는 안타깝다는 눈빛을 보냈고, 누군가는 고소하다는 듯 입가를 씰룩였다. 그 시선들 사이에서 나는 마치 유리 상자에 갇힌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박스 하나에 3년간의 흔적을 쑤셔 담았다. 책상 서랍 안에 굴러다니던 볼펜들, 언제 받았는지 기억도 안 나는 감사패, 소미와 함께 찍은 사진이 든 액자까지. 그 액자를 박스에 넣을 때 손이 잠깐 멈췄지만, 결국 그냥 뒤집어서 넣었다. 다른 직원들은 애써 내 쪽을 보지 않으려는 듯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몇몇은 짧게 목례만 건넸다. 그마저도 고마웠다. 회사를 나섰을 때 하늘은 이상하게도 맑았다. 이런 날에는 소미와 손을 잡고 산책이라도 나갔을 텐데,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가 곧 헛웃음이 나왔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담배 한 대를 태우며 오피스텔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적어도 집에는 소미가 있을 테고, 그녀에게 오늘 일을 털어놓으면 조금은 위로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오늘 저녁엔 그녀가 좋아하는 마라탕이라도 시켜야겠다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하루를 이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신발장 위에 놓인 남자 구두 한 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브랜드, 익숙한 크기. 임태호의 것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소미의 원피스 자락을 보는 순간, 심장이 갓 잡은 활어처럼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거실을 가로지르는 몇 걸음이 그렇게 멀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안방 문을 열었다. 눈에 들어온 광경을 여기 다 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소미가 이불을 끌어당기며 나를 올려다봤고, 그 눈빛에는 미안함보다 짜증이 먼저 서려 있었다. "어차피 알게 될 거였잖아." 그녀가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며 중얼거렸다. "오빠가 그렇게 출장만 다니는데, 나도 사람인데 외로웠다고."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저 문틀에 몸을 기댄 채 옴짝달싹 못하고 서 있었을 뿐이었다.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입술만 벙긋거렸을 뿐,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방 안쪽 어딘가에서 임태호의 옷이 걸려 있는 게 보였고, 그 사실이 오히려 현실감을 더해줬다. 이 모든 게 술김에 벌어진 실수가 아니라는 것. 오늘 아침 내가 짤린 것도, 지금 이 순간도, 전부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결말이었다는 것. 결국 그날 밤, 나는 집도 직장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짐 가방 하나를 끌고 거리로 나섰을 때 가진 돈은 통장에 남은 이십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카드 앱을 열어 잔액을 확인하는 손끝이 시렸다. 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 캔맥주를 들이켜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도심의 밤하늘이 이상하게도 서럽게 느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마저 전부 나를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뭐라도 사려고 지갑을 열었을 때 예전에 사놓고 잊고 있던 로또 한 장이 지갑 안쪽에서 툭 떨어졌다. 반쯤 접힌 종이를 주워들며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 것도 다 헛짓이지 싶었지만, 딱히 버릴 이유도 없어서 주머니에 다시 쑤셔 넣었다. 편의점 직원이 계산대 너머로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여력조차 없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종이 한 장이 내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놓을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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