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떨어지는 몸이 허공을 갈랐다.
바람이 뺨을 때리고, 옷자락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도윤의 눈앞으로 절벽의 암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회색 돌덩이들, 이끼 낀 틈새, 삐죽 튀어나온 나뭇가지들이 순서 없이 시야를 훑고 사라졌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것을 이미 한 번 겪어 본 자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몸이 너무 놀라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무섭지가 않다니, 이것도 참 우습구나.'
그저 어머니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강도윤으로 살아온 열 몇 해, 그 짧은 삶 속에서도 가장 아쉬운 것은 결국 그 얼굴 하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진이라도 한 장 구해 놨어야 했거늘.'
바람 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시간이 늘어지는 듯한 착각 속에서, 도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콰아앙!
등이 무언가에 부딪히며 세상이 하얗게 번쩍였다.
숨이 턱 끊겼다. 폐 속의 공기가 통째로 빠져나가는 듯한 충격이 온몸을 관통했다.
다행히도 절벽 중턱에 튀어나온 나무뿌리 더미가 그의 낙하를 완전히는 아니지만 상당히 완충시켜 주었다. 뿌리들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그 사이로 도윤의 몸이 튕겨 나갔다. 그리고 다시 몇 바퀴를 굴러, 도윤은 좁은 바위턱 위에 널브러졌다.
투두둑, 흙과 잔돌이 뒤따라 쏟아져 내렸다.
온몸이 부러진 듯 아팠다.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갈비뼈 어딘가에서 뻐근한 통증이 올라왔고, 오른쪽 팔은 감각이 거의 없었다.
'죽지 않았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 있었다.
도윤은 간신히 눈을 떴다. 시야가 흔들리고, 하늘이 뒤집힌 것처럼 어지러웠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겨우 초점이 잡혔다.
그리고 그 순간, 바위턱 안쪽 그늘에 무언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이었다.
백발이 흐트러진,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인이었다. 낡고 해진 도포를 걸치고 있었고, 옷 곳곳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였다. 아직 마르지 않은 듯, 도포 자락 아래로 검붉은 액체가 조금씩 배어 나오고 있었다.
노인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셀 수 없이 나 있었다. 그중 하나는 가슴을 관통한 듯한 깊은 자상이었다. 그 상처의 깊이만 보아도,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벌써 숨이 끊어졌어야 마땅했다.
'이 노인, 죽어가고 있잖아.'
도윤은 아픈 몸을 이끌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팔 하나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몸을 반쪽만 세우고 기어가듯 움직였다.
가까이서 보니 노인의 안색은 종이처럼 창백했다.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고, 숨소리는 가늘고 불규칙했다. 이대로 두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뻔했다.
노인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흐릿하던 눈동자가 도윤을 향했다.
"...누구냐." 노인의 목소리는 바람에 흩날리는 재처럼 힘이 없었다.
"강도윤이라 합니다." 도윤은 배낭을 뒤져 남은 지혈산과 물을 꺼냈다. 배낭도 절벽을 굴러 내려오며 이미 반쯤 찢어져 있었지만, 다행히 속에 든 약봉지는 무사했다. "괜찮으시다면, 이거라도..."
노인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도윤의 손끝에서, 배낭에서, 다시 도윤의 얼굴로 천천히 옮겨갔다.
"어린 놈이..." 노인이 헛기침처럼 웃었다. 웃음소리 끝에 옅은 핏기침이 섞였다. "제 몸도 만신창이면서 남을 걱정하는가."
"어차피 저도 곧 죽을지 모릅니다." 도윤이 지혈산을 노인의 상처에 조심스레 발랐다. 손끝이 떨렸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움직였다. "그렇다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 노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이대로 두면 정말로 죽는다. 그것만은 분명하지.'
노인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옅은 빛이 감돌았다.
'저 미련한 눈빛이라니. 이 산에서, 죽어가는 낯선 노인을 위해 자기 마지막 물자를 내놓는 아이가 있을 줄이야.'
노인은 오랫동안 도윤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놀라움과 함께, 무언가 가늠하는 듯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지혈산이 상처에 닿자 노인의 몸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참아냈다.
"네 이름이 도윤이라 했느냐."
"예."
"나는 청현이라 한다." 노인이 말했다. 그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에는 옅은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몇 백 년 만에, 재미있는 놈을 만났구나."
도윤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몇 백 년? 이 노인, 그냥 오래 산 노인이라는 뜻은 아닐 텐데.'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노인 앞에 있으면 온몸의 통증이 조금 잊혀지는 듯했다. 마치 노인에게서 흘러나오는 어떤 기운이 도윤의 통증을 옅게 눌러주는 것 같기도 했다.
"어르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도윤이 물었다. "이런 상처를 입고도 아직 살아 계시다니, 보통 분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청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응시했다.
그때, 저 멀리서 다시 그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조금 전 절벽 위에서 느꼈던 그 기운과 같은 것이었다. 마치 얼음 조각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가는 듯한 감각.
도윤의 등줄기에 소름이 확 돋았다.
청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방금까지의 옅은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깊은 피로와 경계심이 자리했다.
"놈이 쫓아왔구나." 청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누구 말입니까." 도윤이 물었다.
"음살." 청현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두려움 비슷한 감정이 섞였다. "음양쌍살 중 하나. 나를 죽이러 온 자다."
도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방금 그 기운의 주인이... 저 노인을 이렇게 만든 자란 말인가.'
'그리고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뜻이고.'
"그놈이 어느 정도로 강한 겁니까." 도윤이 다급하게 물었다.
청현은 대답 대신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하나에 담긴 무게가, 어떤 설명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자다." 청현이 말했다. "설명이 더 필요하겠느냐."
도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입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청현은 온몸을 떨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팔을 짚고 힘을 주었지만, 상처가 깊어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몸이 옆으로 기울며 다시 바위 위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이대로는..." 청현이 이를 악물었다. 관통상에서 다시 핏물이 배어 나왔다. "둘 다 죽는다."
"둘 다라니요?" 도윤이 되물었다.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놈은 목격자를 남기지 않는다." 청현이 도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여기 있는 것을 안 이상, 너 역시 살아남지 못한다는 뜻이다."
도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게 무슨...'
'재수 없게 절벽에서 떨어졌더니, 이번엔 정체도 모르는 괴물한테 목숨을 위협받는 신세인가.'
'이런 전개는 예상에 없었거늘.'
바위턱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마치 어둠 그 자체가 형체를 갖춘 듯, 윤곽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 존재였다.
그 존재감만으로도 도윤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릎이 절로 꺾일 듯한 압박감이 짓눌러 왔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 도윤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청현 역시 그 그림자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처 입은 몸으로 겨우 앉아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죽음이, 바로 그곳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