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출발 전날 밤, 도윤은 좁은 방 안에 쭈그려 앉아 짐을 꾸리고 있었다.
낡은 등잔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비친 그림자도 함께 흔들렸다. 도윤은 그 그림자를 곁눈질하며 혼자 중얼거렸다.
"물, 마른 육포, 화섭자, 약초 몇 가지."
손끝으로 하나씩 짐을 짚어가며 세는 모양새가, 마치 소풍 준비를 하는 아이 같았다. 겉으로는.
'물주머니 하나, 육포 몇 조각, 부싯돌 대신 화섭자 하나, 지혈에 쓸 풀뿌리 몇 줌. 이걸로 혈풍산에 들어간다니, 우습기도 하지.'
낡은 배낭 안에 든 것들은 초라했다. 정식으로 문파의 무사가 혈풍산에 들어갈 때 지참하는 물품 목록을 도윤은 예전에 흘려들은 적이 있었다. 방한복, 예비 무기, 영약 몇 종, 신호탄까지. 지금 도윤의 배낭에 든 것은 그 절반도 되지 않았다.
'어차피 넉넉히 챙겨준다 해도, 살아나올 확률이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
도윤은 배낭 끈을 다시 조이며 피식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코웃음에 가까웠다.
'후천육단짜리 애송이 하나 죽으라고 보내는 자리에, 뭘 그리 후하게 챙겨주겠나. 본좌가 그 입장이었어도 똑같이 했을지고.'
방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도윤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낮고 무거운 발걸음. 형들 중 하나였다. 넷째 형이었다. 손에 작은 보따리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등잔불이 타는 소리만 파직파직 울렸다.
"이거 받아라."
넷째 형이 보따리를 던졌다.
도윤은 얼떨결에 두 손으로 받아냈다. 묵직했다. 예상보다 훨씬.
풀어보니, 상급 지혈산 몇 봉지와 낡은 단검 한 자루가 들어 있었다. 단검의 손잡이는 오래 써서 반질반질했지만, 날은 여전히 서늘하게 빛났다.
"...감사합니다."
도윤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번엔 연기가 아니었다. 순수하게, 놀랐다.
"고마워할 것 없다."
넷째 형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시선을 피했다.
"어차피 죽을 거, 조금이라도 오래 버티다 죽으라는 거다."
말투는 차가웠지만, 시선을 피하는 그 모습이 오히려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도윤은 문득 예전 기억 하나가 스쳤다. 넷째 형이 어릴 적, 마당에서 넘어진 자신을 업어준 적이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지금처럼 서먹서먹하지 않았다.
"형님."
도윤이 뭔가 더 말하려 했으나, 넷째 형은 그 말을 끝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도윤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에 든 보따리의 무게가 서서히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모든 형제가 나를 비웃는 건 아니었군.'
짧은 온기였다. 손바닥만 한 온기.
그 온기를 가슴 한 켠에 담고, 도윤은 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했다. 단검은 허리춤에, 지혈산은 배낭 안쪽 깊숙한 곳에 챙겨 넣었다. 가장 마지막에 쓸 것을, 가장 먼저 잃어버리면 안 되는 법이다.
그날 밤, 도윤은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낡은 이불 속에서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며, 내일 아침의 풍경을 미리 그려보았다.
'죽으러 가는 길에 잠까지 설치면 손해지. 그래도... 잠이 안 오는 걸 어쩌겠나.'
***
새벽, 도윤은 궁문 앞에 섰다.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시간이었다. 강필호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혈풍산 초입까지는 내가 데려다주겠다."
강필호가 말했다. 목소리에 평소와 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관도를 따라 걸었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발밑에서 자갈이 버석버석 소리를 냈다. 이따금 강필호가 곁눈질로 도윤을 살폈지만, 이렇다 할 말은 없었다.
"산에 들어가면,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해라."
한참을 걷다가 강필호가 입을 열었다.
"혈풍산은 안개가 자주 낀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방향을 잃으면, 열에 아홉은 다시 못 나온다."
"명심하겠습니다."
도윤이 대답했다. 대답은 짧았지만, 속으로는 그 정보 하나를 꼼꼼히 새겨두었다.
'안개, 방향 감각 상실. 하나 더 알았군. 살아남으려면 이런 사소한 정보 하나하나가 목숨줄이 될지고.'
해가 완전히 떠오를 즈음, 저 멀리 검붉은 산줄기가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혈풍산.
멀리서 볼 때는 그저 붉은 기운이 도는 산이었지만, 가까워질수록 그 붉음이 단순한 흙빛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산 전체가 오래된 상처처럼, 검붉게 짓눌려 있는 듯한 색이었다.
산 초입에서, 강필호가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혼자다."
강필호가 말했다.
"예."
도윤이 대답했다.
"기억해라. 산 중심부로 갈수록 기연의 확률도, 죽을 확률도 함께 높아진다."
강필호는 그렇게 말하며 도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에는 훈계와 걱정이 반쯤 섞여 있었다.
"섣부른 욕심은 부리지 마라. 어중간한 곳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살아 나올 확률이 두 배는 올라간다."
"...알겠습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산길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발밑의 흙은 유난히 축축했고, 신발 밑창에 붉은 흙이 그대로 눌어붙었다.
등 뒤에서 강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윤아."
도윤이 돌아보았다.
강필호의 표정이 순간, 아주 짧게, 예전의 그 온화한 얼굴로 돌아온 것 같았다. 도윤이 아직 어렸을 때, 마당에서 처음 검을 쥐여 주던 그 얼굴이었다.
"...살아서 돌아오거라."
그 말을 끝으로 강필호는 몸을 돌려 관도를 따라 사라졌다.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마침내 길모퉁이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다.
도윤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산속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살아서 돌아오라니. 쉬운 말이지. 본좌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구먼.'
***
산속의 공기는 무겁고 축축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조차 검붉게 보였다. 마치 세상 전체에 얇은 핏빛 막이 씌워진 것 같았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젖은 흙이 신발에 달라붙었고,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드는 바람에는 이상한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한 시간쯤 걸었을 때, 도윤은 이상한 냄새를 느꼈다. 비릿하고 시큰한 냄새.
걸음을 멈추고 코를 킁킁거렸다. 바람의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왼편 덤불 쪽에서 냄새가 짙어지고 있었다.
'피 냄새. 그것도 꽤 진하군.'
도윤은 조심스레 덤불 쪽으로 다가갔다. 손은 이미 허리춤의 단검 손잡이에 닿아 있었다.
덤불을 헤치자, 뜯어먹힌 짐승의 사체가 눈에 들어왔다. 살점이 절반은 사라져 있었고, 뼈마디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파리 몇 마리가 그 위를 맴돌았다.
도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 산은 정말로 이름값을 하는군.'
사체를 자세히 살펴보니, 물린 흔적이 이빨자국이라기보다는 통째로 뜯겨나간 듯한 모양이었다. 이빨 하나의 크기가 도윤의 손바닥만 했다.
'저만한 이빨을 가진 놈이라면... 몸통도 그만큼 크겠지.'
도윤은 사체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발밑을 살피며, 최대한 소리를 죄여가며 걸었다.
계속 걸었다. 발밑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도윤은 걸음을 멈췄다.
부스럭.
덤불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도윤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손끝은 이미 식은땀으로 미끌거리고 있었다.
'설마 벌써?'
도윤은 낡은 단검을 뽑아 들었다. 손끝이 떨렸다.
크르르릉.
낮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어른 몸통만 한 짐승이 덤불에서 튀어나왔다.
검은 털에 붉은 눈, 이빨이 유난히 긴 산짐승이었다. 조금 전 보았던 사체의 이빨자국과 정확히 일치하는 크기였다.
도윤은 뒷걸음질 쳤다.
'후천육단의 힘으로 저걸 상대할 수 있을 리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이 돌아갔다. 도망칠 방향, 나무를 탈 수 있을지, 단검으로 노릴 만한 약점이 있을지. 하지만 어느 하나도 확실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형님한테 부적이라도 하나 더 얻어 왔어야 했거늘.'
짐승이 낮게 몸을 웅크렸다. 곧 뛰어오를 자세였다. 붉은 눈동자가 도윤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도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피할 곳도, 도망칠 곳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조차 사라졌다. 짐승의 앞다리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이, 도윤의 눈에는 마치 느린 그림처럼 보였다.
'이렇게 첫날부터 끝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