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겨울 마녀, 파멸의 서약

4화

얼음 나무가 완전히 부서졌다. 콰앙!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얼음 조각 하나가 내 뺨을 스쳤다. 따가움보다 서늘함이 먼저 느껴졌다. 손등으로 뺨을 훔쳤다. 피는 나지 않았다. 그 안에서 뭔가가 걸어 나왔다. 인간의 형태였지만, 그림자로 이루어진 몸. 윤곽만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검은 안개처럼 흔들렸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붉은 빛만 있었다. 그 빛이 깜빡였다. 마치 숨을 쉬듯이. [경고: 미확인 개체 — 위협 등급 측정 불가] 다혜의 장비가 미친 듯이 경고음을 냈다. 삐빅삐빅삐빅.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이게 뭐예요, 이게 대체." 다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손에 든 장비를 몇 번이나 다시 두드렸다. 화면이 계속 오류를 뿜어냈다. 나는 알았다. 게임에서 이 형태를 본 적이 있었다. 마녀의 잔영. 실체가 아니라, 마녀의 기억과 원한이 만들어낸 파편. 본체보다 약하지만, 그래도 대륙 최강급 몬스터를 상대할 전력이 필요한 존재. 게임에서는 공략 파티가 최소 서른 명이었다. 지금 우리한테 있는 전력은 여섯. 그중 하나는 이미 얼어붙어 죽었다. 여섯도 아니었다. 다섯. 계산이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숫자를 붙잡고 있었다. 뭐라도 붙잡아야 했다. "유진, 원거리 공격!" 내가 외쳤다.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았다. 유진이 즉시 마법을 시전했다. 손끝에 붉은 마력이 몰렸다. [화염구 시전] 불덩이가 그림자를 향해 날아갔다. 공기가 뜨거워졌다. 잠깐이지만 희망 비슷한 게 가슴에 스쳤다. 닿는 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이 그대로 그림자에 흡수됐다. 마치 물속에 촛불을 던진 것처럼, 소리도 빛도 없이 사라졌다. "안 통해!" 유진이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는 게 보였다. 그림자가 손을 들었다. 그것만으로 궁수가 뒤로 튕겨 날아갔다. 아무 손짓도, 마법 같은 것도 없었다. 그냥 공기가 밀려난 느낌이었다. 쿠당탕. 벽에 부딫혀 그대로 쓰러졌다.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숨을 쉬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이건 상대가 안 돼." 정찰병이 뒷걸음질쳤다. 뒷걸음질 치는 발이 자갈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철수해야 해요, 부지부장님!" 맞는 말이었다. 나도 알았다. 머리로는 알았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여리, 아니 지금 저 몸을 차지한 존재가 여리를 완전히 집어삼킨 건지, 아니면 아직 안에 여리가 남아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저 붉은 눈 안쪽에, 아직 그 애의 눈동자가 있을까.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게임에서는 이 시점에, 성녀가 아직 완전히 각성하지 않았다고 설명됐다. 일부만 흘러나온 상태. 그 말은, 지금 저건 진짜 마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진짜였다면 우리는 이미 전멸했을 거다.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이런 상황에서 다행이라는 말을 쓰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다혜, 여리한테 뭔가 이상 반응 있어?" 내가 물었다. 다혜가 장비를 다시 확인했다. 손이 떨리고 있었지만 손가락은 정확하게 화면을 넘겼다. "저, 저 여자아이 몸에서 마력이 두 종류로 나와요. 하나는 저 그림자고, 다른 하나는..." "다른 하나는?" "훨씬 약한 파동이에요. 사람 같은 파동." 여리가 아직 안에 있다. 그 사실이 확실해지자, 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시간이 없었다. 유진이 다시 시전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림자는 우리를 하나씩 노릴 게 뻔했다. "유진, 다시 원거리 공격. 그림자 본체가 아니라, 여리 발밑을 노려." "뭐?" 유진의 눈이 커졌다.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 쳐다봤다. "저건 그림자를 통해 여리 몸을 조종하는 거야. 접점을 끊어야 해." 확신은 없었다. 게임 지식으로 유추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게임에서 이 전투를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이건 원작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아는 건 오직, 성녀의 각성 단계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는 대략적인 흐름뿐이었다. 구체적인 전투 방식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데도 말해야 했다. 가만히 있으면 전부 죽으니까. 유진이 나를 잠깐 바라봤다. 확신 없는 내 표정을 읽었을까. 그래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보죠." 짧게 말하고, 유진이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화염구 시전] 이번엔 여리의 발밑을 향했다. 불덩이가 낮게 깔려 날아갔다. 그림자가 반응했다. 순식간에 방향을 바꿔 유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주 빨랐다. 눈으로 좇기도 전에 이미 거리를 좁혔다. "유진, 피해!" 늦었다. 서걱. 그림자의 손이 유진의 가슴을 관통했다. 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살을 찢는 소리도, 뼈가 부서지는 소리도 없이, 그냥 서걱, 하나였다. 그녀의 몸에서 서리가 번지기 시작했다. 하얀 결정이 피부를 타고 순식간에 목까지 올라왔다. "유진!" 나는 뛰어갔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다. 머리는 위험하다고 소리치고 있었는데, 다리는 이미 그림자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림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붉은 눈이 나를 응시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감각이 훑고 지나갔다. "넌 다른 것 같은데."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사람의 목소리도, 짐승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여러 겹의 소리가 겹쳐서 나는 것 같았다. "뭔가, 알고 있는 얼굴이야." "뭘 안다는 거야."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억지로 힘을 줘서 말했는데도 티가 났다. 그림자가 웃었다. 웃는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보였다. 입이 있어야 할 자리가 살짝 휘어졌다. "모르겠지만, 신경 쓰이네. 그래서 죽이기 전에 물어봐야겠어." 그림자의 손이 나를 향해 뻗어왔다. 서리가 손끝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했다. 손끝이 새하얗게 얼어붙는 게, 이상하게도 아주 느리게 보였다. 이대로 죽는 건가. 이런 데서. 이렇게. 그 순간이었다. "안 돼!!" 다혜가 나를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등 뒤에서 몸이 밀리는 감각과 동시에 시야가 뒤집혔다. 그림자의 손이 나 대신 그녀를 관통했다. 다혜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표정에는 아직 놀란 채 그대로였다. 나를 밀친 그 손의 자세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버렸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목 안에서 뭔가가 막혀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안 돼, 다혜, 안 돼." 말이 되지 않는 말들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나는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손끝에 닿은 피부가 이미 얼음처럼 차가웠다. 정찰병은 이미 쓰러진 채였다. 승우는 얼어붙어 죽었다. 유진도 서리에 잠식되고 있었다.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몸에서 서리가 번지는 속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섯 명. 다섯 명이 순식간에 무력화됐다. 남은 건 나 하나였다. 그리고 그림자는 여전히 내 앞에 서 있었다. 붉은 눈이 나를, 그리고 얼어붙은 다혜를 번갈아 바라봤다. 마치 흥미로운 걸 발견한 것처럼, 그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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